문해력 저하는 모바일 시대의 숙명이다. 대중교통에서 책을 든 승객을 찾아보기도 쉽지 않다. 유튜브나 게임, 드라마 시청에 익숙하다 보니 사람들은 ‘사흘’을 ‘4일’로 알고 ‘심심한 사과’라는 말에 발끈한다. 사과하는 자가 심심하다니, 태도가 글러먹었다는 것이다.
한국의 청소년도 예외가 아니다. 2020년 방영된 EBS의 <당신의 문해력>에서 고등학교 2학년 교실의 학생들은 ‘기득권’이라는 개념도, ‘차등’이라는 말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니 교과서에 흔히 나오는 표현, 예컨대 ‘기득권이 재생산되는 사회구조’나 ‘롤스가 말한 차등의 원칙’ 앞에서 학생들은 숨이 막힌다. 그저 단어와 단어 사이를 표류하다 까무룩 잠이 들고 만다. 교육계의 연구에 따르면, 문해력 저하는 학업에서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중요 원인이다.
논술은 수능보다 한층 깊은 독해력을 요구한다. 인문계 대입 논술은 자기 입맛대로 글을 적어 내는 수필이 아니다. 주어진 제시문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하고, 이를 바탕으로 문제가 묻는 바에 자신이 도출한 결론을 적어 내야 한다. 그런데도 일부 학생들은 최소한의 독해력도 없이,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독해력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도 없이 논술을 기웃댄다.
논술에서 독해력이 왜 중요한가
논술은 대학에서의 학문 수행 과정을 그대로 담았다. 대학생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첫째는 선행 연구를 익히는 것이다. 예컨대 심리학과 학생이라면 수많은 선배 심리학자들의 저작물을 읽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논술 출제자는 수험생이 이러한 작업을 대학에서 해낼 수 있을지 평가하기 위하여 문제와 함께 많은 양의 텍스트를 제시한다. 이를 정확하게 읽고 자신의 말로 요약할 수 없다면, 그보다 훨씬 방대한 양의 글을 소화해야 하는 대학생으로 받아 줄 수가 없다.
대학에서 수행해야 하는 두 번째 과제도 논술에 그대로 적용된다. 선행 연구를 익힌 대학생은 이에 기반하여 자신의 아이디어를 내야 한다. 여기에는 기존 연구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일, 대안을 마련하는 일 등이 포함된다. 즉 자기만의 가설을 도출하고 이를 논리적으로 방어할 수 있어야 한다. 논술이 학생에게 요구하는 바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여기에도 독해에 기반한 사고력이 필수적이다. ‘가설’이란 스스로 생각해 낸 잠정적 결론이다. 이러한 가설은 머릿속에서 ‘번뜩’ 떠오르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의 도약을 위해서는 많은 양의 독서 경험이 선행되어야 한다. 예컨대 어떠한 견해를 비판하려 한다면, 다양한 개념과 논리가 머릿속에 차 있을 때라야 그 견해를 읽은 순간 비판의 아이디어가 개념의 조합으로 떠오른다. 이는 최근 관심을 끌고 있는 인공지능 <챗GPT>가 여러 정보를 순식간에 조합해 답을 내는 과정과 유사하다. 반면 독서량이 적고 생각의 경험이 얕은 학생들은 생각의 도약에 실패하여 제시문을 베낀 답안을 제출하고 만다.
물론 논술에서는 독해력 외에 쓰기 능력도 중요하다. 논술 시험장에서 최종적으로 제출해야 하는 성과물은 결국 답안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논술의 필수 역량을 굳이 수치화한다면 읽고 생각하는 힘이 80, 글로 적어 내는 힘이 20이다. 앞서 말했듯, 논술은 단순한 글쓰기 시험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식의 글과 관련된 일이라면, 예컨대 신춘문예 응모라면 흡인력 있는 문장과 재치 있는 표현이 필수적이겠지만 학문적 글쓰기에 속하는 논술에서 그러한 기교는 필요하지 않다. 논술에서 쓰기는 사고력을 적절하게 가시화할 수 있는 수준으로 충분하다.
글을 읽지 않는데 글로 대학을 갈 수야
그런데 학생들은 글을 읽으려 하지 않는다. 논술을 하겠다면서 글 읽기는 기피한다. 여기에는 코로나19가 한몫을 했다. 올해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은 중3 때부터 비대면 체제로 10대 후반을 보냈다. 아직 집중력이 약한 청소년을 컴퓨터 앞에 앉혀놓기 위하여 선생님들은 온갖 알록달록한 영상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 노고는 감사한 일이지만, 결과적으로 학생들은 개념적이고 추상적인 사고력을 키울 수 있는 텍스트 리딩의 기회를 잃고 말았다. 글을 접해 본 경험이 부족하다 보니, 읽지 않는 게 아니라 읽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독해력과 사고의 강화 없이 문제 풀이와 어법 교정식 첨삭에 머물고 있는 일부 논술 강의나 학원의 현실은 개탄스럽다. 물론 ‘시험으로서의 논술’에 대비하는 것이기에 문제를 통하여 실전 감각을 유지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텍스트 독해력은 문제 풀이만으로 늘지 않기 때문이다. 제시문을 이해하고 가설을 제안할 수 있는 생각의 힘을 키우려면 빡빡하게 텍스트를 읽어내는 노력이 병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과정 없이 논술의 기교만 배운다면, 비유컨대 역도 선수가 체력은 키우지 않고 바벨을 들어 올릴 자세만 배우는 셈이다. 아무리 자세가 좋아도 근육에 힘이 없다면 경기장에서 주저앉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어떤 책을 읽을 것인가? 만약 논술을 할 결심이 섰다면, 그리고 논술에서 텍스트 리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깨달았다면 우선 세 권의 책부터 추천한다.
① 야마구치 슈,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다산초당) : 호흡이 긴 글에 익숙하지 않은 학생들이 독해 훈련을 시작하기에 좋다. 논술에 자주 나오는 주제와 개념들이 짤막짤막한 50개 챕터로 알차게 묶였다.
② 리처드 니스벳, 「생각의 지도」 (김영사) : 동양과 서양의 사고 차이를 분석한 문화심리학자의 연구서다. 다양한 심리 실험과 사례를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연세대 논술을 비롯하여 여러 대학에서 텍스트 일부가 인용되거나 주제가 활용되었다.
③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김영사) : 집에 꽃혀 있기는 해도 정작 제대로 읽어 본 사람은 적다. 하지만 공리주의, 시장의 도덕성, 롤스의 정의론 등등 논술에서 자주 다뤄지는 주제로 꽉 찬 논술의 필독서다. 읽기에 수월하지는 않지만, 완독을 해 냈다면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높은 경쟁률을 뚫을 비장의 무기, 리딩
논술은 경쟁률이 수십 대 일, 때로는 그 이상이다. 2023학년도 성균관대와 한양대의 논술 경쟁률은 각각 평균 100대 1을 넘었다. 물론 수능 최저 조건을 요구하는 대학의 경우 실질 경쟁률은 명목 경쟁률보다 낮아지겠지만, 여전히 만만하게 볼 수준은 아니다. 그러나 학생들은 이러한 경쟁을 뚫을 만한 별다른 전략도 없이, 남들이 다 하는 정도에 머문다. 그저 문제를 보고, 답안을 적고, 맞춤법이 교정된 답안지를 돌려받으면서 ‘논술이 이런 거구나’ 시간을 보낸다. 이른바 ‘논술은 로또’라는 속설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고만고만한 수험생 중 시험 당일 운 좋게 익숙한 주제를 만난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 사이에 당락이 갈리는 것이다.
만약 논술 전형을 마음에 두고 있다면, 그 많은 경쟁자를 떨어뜨리고 붙을 수 있는 자기만의 근거가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경쟁률이 50대 1이라고 하자. 나머지 49명과 내가 다른 점은 무엇인가? 남들과 똑같은 식으로 준비하면서 요행을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일은, 그 50명 100명 중에서 빡빡하게 책을 읽고 생각의 힘을 키워가면서 논술을 준비하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는 사실이다. 논술 합격을 위해 가장 확실한 경쟁력은, 리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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