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저널 황혜원 기자] 우리나라 R&D(연구·개발) 예산은 지속 증가하고 있지만 인문사회 분야 예산은 점차 축소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전체 R&D 예산은 27조4005억원으로 2017년 19조4615억원에 비해 40% 가까이 늘었다. 반면 인문사회 R&D 예산은 5.2% 증가하는데 그쳤으며, 전체 R&D 예산에서 인문사회 예산이 차지하는 비율은 오히려 감소했다.
인문사회 분야는 과학기술 분야와 비교해 연구과제와 연구비가 적을 뿐만 아니라 인건비와 연구자 지원 프로그램 등에서도 큰 격차를 보여 사회와 학계에서 필요로 하는 후속세대 양성에 한계가 있다. 이에 따라 인문사회 연구 축소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인문사회 R&D 예산, 전체의 1% 수준
최근 5년간 정부의 전체 R&D 예산은 지속적으로 확대됐다. 2017년 19조4615억원을 시작으로 2018년 19조6681억원, 2019년 20조5328억원, 2020년 24조2195억원에 이어 지난해에는 역대 최고인 27조4005억원을 기록했다.
이 가운데 지난해 인문사회기초연구와 인문학진흥, 한국학진흥, 사회과학연구지원 사업 등을 합친 인문사회 분야 순수 R&D 예산은 2017년 3064억원보다 162억원 늘어난 3226억원으로 집계됐다.
전체 R&D 예산이 연평균 8.9%의 증가율을 기록하는 동안 인문사회 R&D 예산의 연평균 증가율은 1.3%에 불과했다. 특히 전체 R&D 예산에서 인문사회 R&D 예산이 차지하는 비율은 2017년 1.6%에서 지난해에는 1.2%로 오히려 하락했다.
인문사회-과학기술 분야 간 연구비와 과제수 등의 격차는 정부 인문사회 R&D 예산 대부분을 집행하는 한국연구재단 집계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2020년 전국 대학 연구활동 실태조사 분석보고서에 따르면 전국 4년제 대학이 2020년 중앙정부 예산 지원으로 수주한 사회과학과 인문학, 예술체육학, 복합학 등 인문사회 분야 연구비는 4671억원이다. 반면 자연과학과 공학, 의약학, 농수해양학 등 과학기술 분야 연구비는 10배를 상회하는 4조8381억원이다.
교원 1인당 연구비에서도 인문사회 분야 1430만원, 과학기술 분야 1억1470만원으로 큰 차이가 났다. 또한 인문사회 분야 과제수는 5967건으로 과학기술 분야 3만8485건의 6분의 1에 불과했다.
지난 2017년부터 2020년까지 연구비와 과제수 등의 추세를 보면 전체 연구비 증가에 따라 인문사회 분야의 연구비와 1인당 연구비는 소폭 증가했다. 하지만 과제수와 과제 점유율은 꾸준히 감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연구비 점유율은 지난 2017년 10%에서 2018년과 2019년에는 각각 9%대로 하락했으며, 2020년에는 8%대로 감소했다.
연구비 총액 한정적…인문사회 분야 지원 적어
연구 안정성·지속성↓, 생계유지 등 어려움 커
이처럼 열악한 지원으로 인한 연구 안정성과 생계유지 어려움 등은 실질적으로 연구를 수행하는 연구자들의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한 수도권 사립대학의 시간강사 겸 비정규직 연구자인 A씨는 “박사 초년생들을 위한 생계 지원이 절실하다”며 “생계유지를 위해 강사로 일하고 있지만, 임금이 열악하고 연구를 위한 현장조사 등 비용도 자비로 충당할 때가 많아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고 말했다.
연구의 지속성 문제도 지적됐다.
지난 2020년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학술연구교수(B유형) 지원사업에 참여한 영남대 소속 연구원 B씨는 “인문사회 학문 특성상 과학기술 분야처럼 별도의 실험과 실습 등이 필요하지 않은 만큼 적은 연구비 지원은 이해할 수 있다”며 “하지만 많은 연구과제가 1년 단위의 단기 사업으로 진행돼 연구의 계속성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A유형처럼 기간이 연장된다면 더 다양하고 심층적인 연구가 가능해질 것”이라고 전했다.
이강재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본부장은 “최근 인문사회학술연구교수 사업 등을 통해 학문후속세대의 지원을 확대하고 있지만 단기와 소액 지원 비중이 높은 편”이라며 “전체 예산이 감소한 상태에서 지원을 늘리다보니 나머지 사업의 선정률이 하락해 연구자의 연구 참여 의지까지 저하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본부장에 따르면 학문후속세대 이외의 지원사업은 지난 2019년 25.4%의 선정률에서 2021년에는 19.2%로 하락했다. 개별 사업에 따라서는 5~7%대의 낮은 선정률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 본부장은 이어 “사회적 요구에 따라 인문사회와 과학기술의 융복합연구를 장려하기 위해 지난 2019년 134억원이었던 융복합연구 분야 연구비를 2021년 179억원까지 증액했지만 연구비 총액이 정체된 상태에서 이뤄지다 보니 결과적으로 다른 사업의 예산을 줄이는 역효과가 나타나 융복합연구의 예산을 증액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인문사회 분야 전문 정책연구기관 설립 필요
이 본부장은 윤석열정부에서 전체 R&D 예산 중 인문사회 연구비를 1조원까지 점차적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엇보다 인문사회-과학기술 분야 간 지원 격차를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과학기술 분야 박사과정생의 연구장려금은 연간 2천만원 정도이지만 인문사회 분야 박사과정생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은 없다. 또한 과학기술 분야 비전임 연구자는 세종펠로우십 프로그램을 통해 연간 1억3천만원의 연구비를 지원받는 반면 인문사회 분야는 인문사회학술연구교수 사업에 따라 A유형(장기) 4천만원, B유형(단기) 1400만원 수준의 연구비를 지원받는다.
인문사회 연구비가 확대되면 인문사회 분야 연구자도 과학기술 분야와 동일한 수준의 인건비를 보장받아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연구활동이 가능해진다. 이렇게 되면 인문사회 학술연구 역량을 한층 끌어올릴 수 있다.
인문사회 분야 연구와 지원을 담당할 전문기관도 필요하다. 이와 관련, 김귀옥 한성대 교수는 인문사회학술정책연구원(가칭) 등의 설립도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현재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산하기관으로 과학기술정책연구원과 한국보건사회연구원, 한국여성정책연구원, 한국노동연구원 등이 설립돼 관련 정책 등을 연구하고 있는 데 반해, 인문학 중심의 연구기구는 없다.
김 교수는 “한국연구재단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로, 교육부를 협의 기관으로 두고 있다”며 “하지만 과학기술 연구는 과기정통부가, 인문사회 연구는 교육부가 담당하는 기형적인 이중구조”라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인문사회 분야 연구자 지원과 연구환류체계, 연구윤리, 시민학술센터 등을 아우를 수 있는 인문사회학술정책연구원 설립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4차 산업혁명 시대, 인문사회 기반 융복합능력 대두
KAIST,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 설립
미국은 1990년대 인간유전체 사업을 추진하며 거대과학기술 프로젝트를 추진할 경우 총 연구비의 5%를 투자해 프로젝트의 윤리와 사회, 법적 영향 등을 연구해야 한다는 ‘ELSI(Ethical, Legal, Social Implication) 원칙’을 세운 바 있다.
또한 미국은 인문학 학술연구를 지원하기 위한 주(州) 단위 인문학위원회와 국립인문학재단, 국립과학재단, 스미소니언재단 등을 운영하고 있다. 정부 소속 기관 이외에도 인문학 연구와 교육을 담당하는 조직은 4만5천여개에 이른다. 특히 국립인문학재단은 미국 내 인문학 과제를 수행하고, 연구자들의 장학금 등을 지원하는 연방 소속 기관으로 매년 6억3500만원 규모의 기금을 각종 인문학 프로젝트에 지원한다.
싱가포르 교육부는 지난해 향후 5년간 4030억원을 투자해 인문학과 사회과학 연구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기존 예산 3086억원 대비 30% 가량 증가한 것이다. 싱가포르 교육부는 당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사람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행동 과학’을 언급하며 사회경제적 관점에서 인문사회 연구를 강조했다.
이처럼 전 세계적으로 가치관이 다변화하고, 코로나19 등 이전에 겪어보지 못한 문제가 새로운 이슈로 떠오르는 가운데, 인문사회가 다양한 문제를 종합적으로 판단하고 기초적인 담론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 메타버스 등으로 대변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서도 인문사회 분야는 대체 불가능한 고유의 영역이며, 오히려 과학기술에 인문사회를 접목한 융복합능력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KAIST(한국과학기술원)는 이같은 학문 조류를 반영해 최근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를 개설하고, 2035년까지 세계 최고의 디지털인문사회과학 교육기관으로 거듭나겠다는 비전을 수립했다.
전봉관 KAIST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장은 “최근 IT업계를 중심으로 인간 중심의 서비스 개발에 몰두하면서 컴퓨터 사이언스 역량과 인문학적 소양을 겸비한 인재를 원하고 있다”며 “이는 IT를 비롯해 이공계 전문가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반대로 인문사회 전문가는 컴퓨터 과학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전 학부장은 이어 “따라서 이공계 학생들에게 인문학적 소양을 길러주기 위해 기존의 인문사회과학부를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로 확대 개편했다”고 말했다.
그는 “흔히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AI 및 빅데이터와 관련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이미 인문학과 사회과학 연구에 데이터 과학 등이 활용되고 있다”며 “정체 상태에 있는 인문사회 연구에 컴퓨터 사이언스와 뇌 과학 등의 공학적인 접근을 접목한다면 연구를 한 단계 발전시키고, 미래지향적으로 도약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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