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진, ‘응시(凝視)’로 자연과 인간의 자리를 바꿔 세우다

강승형 기자 | skynewss@nate.com | 기사승인 : 2025-10-31 16:2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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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관(觀) 사유와 현대철학의 시선
 사진제공=금보성아트센터

 

김혜진 작가의 ‘응시(凝視) 시리즈’는 자연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을 기록한 풍경화로 읽히지 않는다. 이 연작은 자연이 나를 바라보는 순간, 그 시선을 다시 바라보는 장면을 포착한 작업이다. 김혜진은 응시를 단순한 ‘본다’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로 끌어올린다. 화면 속 인물·동물·식물·산·바람이 서로를 마주 보는 구조를 만들고 그 관계를 목격하는 제3의 자리로 밀려난다. 이 지점에서 응시는 감상이 아니라 사유 행위가 된다.

김혜진의 작업은 동양사상에서 말하는 ‘관(觀)’의 태도와 맞닿는다. 유가에서 관은 사물의 질서를 살피고 그 질서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성찰하는 행위다. 불가에서 관은 ‘보는 나’와 ‘보이는 것’을 분리하지 않고, 그 둘의 얽힘을 알아차리는 수행이다. 김혜진은 바로 이 대목을 회화로 끌어온다. 자연은 배경이 아니다. 자연은 응시의 주체다. 인간은 더 이상 세계를 소유하거나 재현하는 자리에 서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과 동물, 인간과 풍경, 인간과 식물은 같은 수평선 위에 선 존재로 처리된다.

이는 서양 현대철학의 언어로도 설명할 수 있다. 미셸 푸코가 ‘시선은 권력’이라고 말했듯이, 누구의 시선이 누구를 규정하는가의 문제는 곧 관계의 위계 문제다. 김혜진은 그 위계를 무너뜨린다. 화면에서 인간은 더 이상 세계를 정의하는 기준점이 아니다. 모리스 메를로퐁티가 ‘살(flesh)’이라 부른, 존재들이 서로 닿고 스며드는 관계성이 전면에 올라온다. 인간과 자연의 감각이 이어진 장면을 작가는 집요하게 그린다. 그 결과 김혜진의 회화는 조용하지만, 시선의 권력 구조를 전복하는 급진성을 품는다.

 

 사진제공=금보성아트센터

 

작품을 보면 이 전복은 구체적 장면으로 드러난다. 밭을 가꾸는 가족을 담은 작품에서 사람들은 흙 속을 들여다보며 손을 뻗는다. 화면의 하단에는 검은 비닐 멀칭과 갈라진 땅, 겨울을 막 벗어난 밭의 거칠고 건조한 표면이 정직하게 놓인다. 인물은 화면 중심에 있지만 중심이 아니다. 이 장면의 주인공은 사실 땅이다. 작가는 땅의 질감, 묵은 풀더미, 수분을 잃은 흙의 색을 치밀하게 기록한다. 사람은 흙을 다루는 존재라기보다 흙 앞에서 몸을 낮추는 존재에 가깝다. 이 구도는 인간이 자연을 관리하는 장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인간이 자연을 응시하는 장면이 아니라 자연 앞에서 멈춰 서 있는 장면이다. 누가 누구를 바라보는지 애매해지는 순간, 작가는 묻는다. 시선의 주도권은 어디에 있는가.

해바라기 앞의 아이를 그린 작품에서도 같은 전환이 나타난다. 캔버스 전면을 가득 메운 해바라기는 거대한 벽처럼 솟아 있다. 화면 왼쪽 하단, 파란 물뿌리개를 든 아이는 등을 보인 채 식물에 물을 준다. 개 한 마리는 그 장면을 가만히 바라본다. 이 구성은 세 겹의 응시를 만든다. 아이는 꽃을 향해 있다. 개는 아이를 본다. 관객은 그 둘을 본다. 그런데 꽃은 전면을 차지한 채 화면 밖인 ‘우리 쪽’을 향해 활짝 열려 있다. 즉 꽃은 관객을 본다. 이 회화에서 주체의 자리는 아이가 아니라 식물이다. 아이는 식물의 성장에 개입하고 있지만, 그 개입은 지배나 통제가 아니다. 아이의 몸짓은 봉사에 가깝다. 자연은 도움을 받는 객체가 아니라 존중의 대상이 된다. 김혜진은 어린 인물과 반려동물을 통해 인간-비인간 존재 사이의 감각적 동맹을 시각화한다.

산길을 따라 염소들과 함께 걷는 인물을 담은 작품은 ‘응시 시리즈’의 사유를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화면 아래 인물은 붉은 모자와 분홍 가방을 멘 채 염소들 사이를 걸어간다. 인물은 관객을 등지고 산의 안쪽을 향한다. 염소 몇 마리는 인물을 향하고, 또 한 마리는 관객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산은 거대한 회색의 벽처럼 솟아올라 장면 전체를 감싼다. 이 구도는 인간이 자연을 향해 나아가는 모험 서사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거대한 생태적 스케일 속에서 아주 작은 존재일 뿐임을 시인하는 장면이다. 화면의 힘은 인물이 아니라 산이 쥐고 있다. 산은 그 자체로 의지를 가진 형상처럼 묘사된다. 거대한 주름과 절리, 바위의 단층과 같은 물질적 디테일이 산을 하나의 ‘얼굴’처럼 만든다. 산은 배경이 아니라 인격화된 응시 주체로 선다. 인물은 그 시선 속으로 들어가는 중이다.

검은 개가 노란 풍경 앞에 앉아 있는 이미지를 지켜보면 화면은 거의 순수한 노란색으로 덮여 있다. 단풍 든 나무로 보이는 이 노란 화면은 추상과 구상 사이를 오간다. 나뭇잎인지, 빛인지, 물질인지 한 번에 단정되지 않는다. 개는 등을 보인 채 화면 안쪽을 향해 앉아 있다. 개의 귀와 목선, 털의 결은 극사실적으로 묘사돼 있고, 그 존재는 화면에서 유일하게 어둡다. 이 대비는 단순한 색 대비가 아니다. 노란 장면은 감각의 장이다. 개는 그 장을 향해 집중한다. 이 장면을 지켜보는 관객은 개의 몰입을 응시하게 된다. 즉 작가는 응시라는 행위 자체를 캔버스 위에 올린다. ‘무엇을 보나’보다 ‘어떻게 보나’에 방점이 찍힌다. 보는 태도 자체가 회화의 주제다.

들꽃과 잡초가 가득한 벌판을 담은 작업은 이 시리즈의 확장선에 있다. 화면은 특정한 인물이나 동물을 거의 지우고 식물 군락을 전면에 세운다. 보랏빛과 연두색이 얽힌 식물의 군집은 질서 없이 퍼지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화면 전역에 미세한 리듬과 깊이를 만든다. 초점은 가까운 식물에 맞춰져 있고, 뒤로 갈수록 산 능선과 들판은 안개처럼 흐려진다. 작가는 시선의 깊이를 이용해 관객의 위치를 고정한다. 관객은 어느 순간, 들판을 내려다보는 존재가 아니라 들판 속에 서 있는 존재가 된다. 즉 관객이 장면을 바라보는 동시에 장면도 관객을 감싼다. 이것이 김혜진이 말하는 응시의 순환 구조다.

연잎과 들국화로 보이는 흰 꽃을 그린 작품은 응시 시리즈의 사유를 더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화면 대부분을 차지한 것은 큰 연잎이다. 넓은 초록의 면, 두툼하게 쌓인 안료, 질감 있는 붓질이 연잎 하나하나를 살아 있는 구조물처럼 세운다. 화면 오른쪽에는 작은 흰 꽃이 위로 솟는다. 작은 꽃은 크기로만 보면 사소하다. 그러나 작가는 꽃을 화면의 가장 밝은 톤으로 처리해 시선을 집중시킨다. 그 순간 거대한 연잎 군락은 무대가 된다. 꽃은 무대의 중앙에 선 주체가 된다. 자연 내부의 위계조차 흔들린다. 크기가 중요하지 않다. 응시의 밀도가 중요하다.

이러한 장면 구성은 장르적으로 흥미롭다. 김혜진의 회화는 전통적 풍경화, 인물화, 동물화, 가족 스냅처럼 보이는 일상 기록화의 요소를 모두 안고 있다. 그러나 장르 안착을 거부한다. 자연만 있지 않고 언제나 누군가가 자연과 관계 맺는 장면이 있다. 반대로 사람이 등장하더라도 그 사람은 인물 중심 회화의 방식으로 영웅화되지 않는다. 다큐멘터리적 사실성과 사적 기록의 온도, 전통적 구상 회화의 묘사력이 한 화면 안에서 교차한다. 결과적으로 이 작업은 관찰 기록이라기보다 관계의 구조를 가시화하는 철학적 회화에 가깝다.

 

 사진제공=금보성아트센터


김혜진의 ‘응시’는 그래서 단순하지 않다. 단지 “나는 이것을 본다”에서 멈추지 않고 “이것도 나를 본다”까지 간다. 또 “나는 그 장면을 목격한다”에서 더 나아가 “나는 그들의 관계를 목격한다”로 확장한다. 응시는 어느 한 방향의 직선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인식하는 망처럼 작동한다. 응시는 관계를 묶는 힘이다.

 

 사진제공=금보성아트센터


이 전시는 관람자에게 한 가지 태도를 요구한다. 감상자가 작품을 해석의 주도권을 가진 최종 독자로 서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관객은 장면 밖에서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신의 자리에 서지 못한다. 관객 역시 장면 안으로 들어온다. 산의 시선, 꽃의 시선, 개의 시선, 아이의 시선 사이 어딘가에 관객은 끼어든다. 다시 말해 김혜진은 회화를 통해 인간의 자리, 자연의 자리, 공존의 자리를 재배열한다.

김혜진의 응시 시리즈는 결국 한 가지를 묻는다. 인간은 자연을 대상화해 온 오랜 습관을 이제 내려놓을 준비가 돼 있나. 작가는 답을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장면을 제시한다. 아이가 꽃에 물을 준다. 염소가 인간을 돌아본다. 개가 노란 빛 속에 앉는다. 들꽃이 화면 전체를 점유한다. 그 장면을 오래 본 사람은 안다. 이 작업은 인간 중심의 세계를 부드럽지만 확실하게 밀어낸다. 인간과 자연이 서로를 바라보는 순간 자체가 더 이상 낭만이나 휴식의 이미지가 아니다. 그것은 동등한 존재 선언이다.

 

 사진제공=금보성아트센터

김혜진의 ‘응시’는 그래서 풍경화가 아니다. 자연 다큐멘트도 아니다. 가족 기록도 아니다. 이 시리즈는 시선의 정치학을 회화의 언어로 번역한 동시대적 생태 사유다. 자연은 풍경이 아니다. 자연은 보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시선 안에서만 존재한다.

글 금보성 백석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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