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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체의 경계를 허무는 혼성 장르
이기선 작가의 ‘Prayer Refined by Fire’ 시리즈는 도자·회화·설치·조각을 넘나드는 혼성적 예술 언어로, 전통과 현대, 물질과 영성을 동시에 호출한다. 흙을 고온에서 굽는 도자 공정과 울트라마린 블루의 자유로운 붓질이 한 화면에서 맞물리며, 도자와 추상회화의 경계를 해체한다.
각각의 타일은 개별적 명상의 단위이자 전체 설치 속에서 리드미컬한 반복 구조를 형성하며, 미니멀리즘적 모듈과 동양적 수행성을 동시에 담아낸다. 이 시리즈는 전통적 공예의 완결성을 거부하고, 오히려 그 불완전성과 과정 자체를 미학의 핵심으로 끌어올린다.
- 불의 변증법과 존재론적 변화
가스토 바슐라르가 『불의 정신분석』에서 언급했듯, 불은 정화와 변화를 이끄는 원소다. 이기선의 작업에서 흙은 불을 거쳐 도자기로 변모하며, 헤겔의 변증법처럼 정(正)–반(反)–합(合)의 과정을 거친다. 불은 단순한 소성이 아니라 존재를 정화하고 초월로 이끄는 매개이며, 청색 안료가 남긴 흔적은 이러한 존재론적 변화의 증거이자 인간 의식이 남긴 기도의 자취다. 완전한 형태보다 과정과 흔적을 드러내는 불완전성은 오히려 신앙의 진실함을 담보한다.
불과 흙이 만나는 그 지점에서 우리는 시작과 끝, 탄생과 소멸의 영원한 순환을 읽는다. 이는 단순한 물질의 변형이 아닌, 인간이 세계와 관계 맺는 근원적 방식을 다시 묻는 철학적 사건이다.
- 기호·문자와 침묵의 언어
사각 도판 위 푸른 선들은 언어 이전의 순수 기호로서, 롤랑 바르트가 말한 ‘텅 빈 기표’를 연상시킨다. 금빛의 작은 집과 배 모티프는 노아의 방주나 베들레헴의 마구간을 암시하지만 교조적 해석을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관객 스스로의 내면적 신앙과 영성을 투사하도록 초대한다.
이 흔적들은 데리다의 ‘차연(différance)’처럼 의미를 끝없이 지연시키며, 발화되지 못한 기도의 언어를 시각적 기호로 남긴다. 점·선·면이 한데 어우러진 구성은 인간이 언어 이전의 차원에서 신과 대화하려는 원초적 욕망을 드러낸다. 관객은 이 기호 앞에서 해석의 열쇠를 스스로 찾으며, 침묵 속에서 스며드는 영적 울림을 감각한다.
- 몸의 현상학과 기도의 제스처
메를로퐁티의 ‘살(flesh)’ 개념을 빌리면, 작가의 손이 붓을 쥐고 휘두르는 순간 주체와 객체의 경계는 사라진다. 붓질 하나하나는 기도하는 몸의 현현이며, 동양 서예적 전통과 서구 추상표현주의의 제스처가 공존한다.
특히 반복적 붓질은 호흡과 맥박을 닮아, 신체가 세계와 교감하는 현상학적 과정을 기록한다. 관객은 작가의 몸짓이 남긴 흔적을 따라가며, 자신의 심장 박동과 세계의 리듬이 교차하는 순간을 간접 경험한다.
- 현대미술사 속 위치와 색채의 신학
한국 단색화가 절제된 색으로 정신성을 강조했다면, 이기선은 강렬한 울트라마린으로 초월적 깊이를 표현한다. 이 색은 중세 성모 마리아의 성스러운 색으로, 괴테가 말한 “거리감과 그리움”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이브 클랭의 IKB가 무한과 절대를 상징했다면, 이기선의 청색은 기도와 응답의 매개로 작동한다. 이는 서구 초월주의와 다른, 동양적·기독교적 영성의 독창적 결합이다. 작가는 전통적 도자와 현대적 색채 실험을 병치하며, 색을 단순한 시각 요소가 아닌 신학적·철학적 매개로 확장한다.
- 시간성과 명상적 체험
이 작품에서 시간은 단선적 흐름이 아닌 순환적 구조다. 도자 소성 과정의 물리적 시간과 기도가 품은 영적 시간이 겹치며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가 만나고, 관객은 찰나와 영원의 경계에서 명상적 몰입을 경험한다.
하나의 붓질이 찰나에 그어지지만 불 속에서 영원히 고정되는 역설은 앙리 베르그송이 말한 ‘지속(durée)’ 개념을 상기시키며, 기계적 시간을 넘어서는 내적 시간을 가능하게 한다.
- 공간성과 관객 참여
그리드 형태로 배열된 타일은 전시장을 단순한 화이트 큐브에서 기도의 성소로 바꾼다. 미르치아 엘리아데가 구분한 ‘성(聖)과 속(俗)’의 위계를 흔들며, 관객이 서 있는 그 자리를 곧 성스러운 현현의 장소로 전환시킨다.
관객은 작품 앞에서 단순한 감상자가 아닌 공동체적 기도의 참여자가 된다. 걸으며 멈추는 동선 속에서 개인적 묵상과 집단적 예배가 교차하며 ‘현대적 순례’의 체험을 이끌어낸다.
- 디지털 시대의 아날로그적 저항
전기가마와 정밀한 온도 제어 같은 현대 기술을 사용하면서도, 이기선은 흙·불·손의 아날로그적 과정을 고집한다. 이는 마틴 하이데거가 말한 ‘거주함(dwelling)’처럼 세계와의 본래적 관계를 회복하는 행위이자, 디지털 시대의 물질적 저항으로 읽힌다.
기술적 재현이 아닌 손의 흔적을 중시하는 태도는 관객에게 현재의 감각을 되찾게 하며, 작품 앞에서 “지금, 여기”의 존재감을 강렬히 느끼게 한다.
- 한국성과 세계성의 공존
도자기는 한국적 전통을 품고 있으나, 기도·초월·변형이라는 보편적 인간 경험을 담아내며 세계와 소통한다. 이는 지역성과 보편성이 교차하는 ‘글로컬라이제이션’의 모범적 사례라 할 수 있다.
한국적 재료와 기법이 세계적 담론과 결합하면서, 이기선의 작업은 한국 현대미술이 세계 미학과 대화하는 또 하나의 언어가 된다.
- 불완전한 기도의 미학
이기선의 「Prayer Refined by Fire」는 종교와 예술, 동양과 서양을 잇는 21세기 영성의 새로운 조형 언어다. 불과 흙, 청색의 흔적은 인간의 불완전한 기도가 어떻게 예술이 되는 지를 증언한다.
관객은 그 흔적 속에서 자신의 기도를 발견하고, 기도 너머의 응답을 기다리는 존재론적 긴장 속으로 초대된다. 이 시리즈는 결국 예술이 곧 기도이고, 기도가 곧 예술이 될 수 있음을, 그리고 불완전함 속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이 태어난다는 사실을 현대미학적으로 선포한다.
“세속화된 시대의 예술은 어떤 방식으로 영성을 담아낼 수 있는가?” 그 답은 완결된 교리가 아닌, 흙과 불, 그리고 몸으로 새겨진 흔적—바로 그 ‘과정’ 속에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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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금보성 백석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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