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급 실전 논제 해부
최상급 실전 논제 해부
  • 대학저널
  • 승인 2011.03.31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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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제에 응답하는 효과적인 개요 짜기
이달의 미션
논제 해설-불편부당함 속에 숨은 시선 찾기

높은 경쟁률을 보이는 주요대 수시모집 논술고사 문제들엔 변별력을 높이기 위한 대학들의 고심이 잘 반영되어 있다. 어떻게 답해도 좋은 이른바 ‘열린 논술’로는 학생들의 학력과 자질을 평가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요대 논제들은 대개, 객관적이면서 정량화된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게끔 까다로운 제시문들이 등장하며, 그들 간의 연관관계도 숨기고 있는 경우가 다반사다.

논제는 엄선된 단어들로 제시문들에 대한 이해와 연관관계 독해 능력을 묻고 있다. 기초적으로 제시문에 대한 오독 여부가 확인될 것이며, 제시문의 핵심 논지를 적절히 추출했는가에서 다시 평가가 갈라질 것이다. 제시문들의 연관관계 파악은 답안의 완성도를 좌우하는 가장 고급스럽고도 난해한 영역이라 할 것이다. 이번 호에서는 이런 최상급 논제 중 하나를 분석의 대상으로 선정했다. 제시문들에서 무엇을 어떻게 읽어내어야 하는지를 배우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실제로 논술문을 작성해보려는 학생들은 먼저 꼼꼼하게 논제와 제시문들을 거듭 읽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논제의 요구 사항에 응답하는 논지의 구성을 잡아주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논지의 구성은 개요로 구체화되어야 한다. 먼저, 연습지에 논제의 주요 요구사항에 응답하는 문단 나누기를 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편이 좋겠다. 개요의 구상 중에 몇 번이고 논제를 확인하여 개요가 논제에 정확히 답하는 외형을 갖췄는지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완성된 개요엔 각 문단의 예정 글자수도 대략적으로 부여하는 것이 필요하다.

대등한 기능의 문단들이라면 분량도 균등히 배분하는 게 좋겠다. 사전에 적절히 배분된 예정 분량은 실제로 논술문을 쓸 때 유용한 지침이 되어 잘 통제되고 균형 잡힌 답안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유능한 조각가가 석재 속에 숨은 아름다운 형상을 가늠하며 돌을 쪼아나가는 것과 같다. 카이론의 논술 캠프에서 효과적인 개요 짜기의 방법을 정리했다.

<카이론의 논술 캠프>
논제에 응답하는 효과적인 개요 짜기
논제의 요구사항을 반영하라
글을 원고지에 쓰기 전에 준비 과정으로서 미리 만들어 놓은 글의 구상과 윤곽을 '개요'라 한다. 구상이 완성되었다 하더라도 구체적으로 도식화해 놓지 않으면 글의 일관성을 잃어버리기 쉬우므로 글을 쓸 때는 반드시 개요를 작성해야 한다.

우리가 작성하는 글은 '일정한 채점 기준이 마련되어 있는 문제에 대한 답안'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즉 특정한 주제나 제목을 가지고 수험생이 자유롭게 마음껏 작성하는 글이 아니라는 뜻이다. 따라서 논술 시험의 답안인 논술문을 작성할 때에는 우선 문제가 요구하는 사항이 무엇이며 그 사항에 따라 기술해야 할 내용이 무엇인지를 먼저 명확하게 파악·정리해 두고 그에 따른 개요를 작성해야 한다. 대체로 요구 항목 하나는 하나의 단락으로 처리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므로 요구 사항이 많은 문제는 그 요구 사항 순서대로 개요를 작성해도 무방하다.

개요 작성의 요령
개요를 작성할 때에는 우선 주제의 내용, 혹은 문제의 요구 사항을 주요 논점으로 설정하여 대항목을 정한다. 그리고 그 대항목을 하나의 단락으로 설정한 다음, 대항목 아래에 기술할 하위 항목을 정리하여 단락의 구성내용을 완성한다. 각 상위 항목과 하위 항목은 일관성 있게 부호나 번호로 표시하며 개요를 작성하는 것이 좋다. 이때 같은 계열의 번호나 기호에는 대등한 내용이 놓이도록 해야 한다.
명심해야 할 것은, 개요의 표준적인 틀이란 있을 수 없다는 점이다. 일부 학생들의 경우 일정한 글쓰기 틀을 미리 만들어 놓고 그 틀에 맞게 그때그때 문장과 단락을 채워넣는 글쓰기를 하는데 이는 매우 위험한 일이다. 논제의 요구 조건에 따라 개요의 양상도 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대략 아래와 같은 구조로 개요를 작성하면 무난할 것이다.

1. 대항목
   [문제의 요구사항1 - [예]‘각 제시문의 내용을 약술하고’]
       [1] 하위항목1 - 제시문 [가] 핵심 논지 기술
       [2] 하위항목2 - 제시문 [나] 핵심 논지 기술

2. 대항목 - 소주제문
   [문제의 요구사항2 - [예]‘각각의 입장에 근거하여 ~를 해석하고’]
       [1] 하위항목1 - 제시문 [가]에 따른 해석1
       [2] 하위항목2 - 제시문 [가]에 따른 해석2

3. 대항목 - 소주제문
   [문제의 요구사항2 - [예]‘각각의 입장에 근거하여 ~를 해석하고’]
       [1] 하위항목1 - 제시문 [나]에 따른 해석1
       [2] 하위항목2 - 제시문 [나]에 따른 해석2

4. 대항목 - 소주제문
   [문제의 요구사항3 - [예]‘이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쓰시오’]
       [1] 핵심 주장과 근거 1
       [2] 핵심 주장과 근거 2

이달의 미션
아래 논제를 읽고 논술문을 작성해보자. 서강대학교 2007학년도 수시1학기 문제 중에서 비중이 가장 높고[40%], 규정자수도 가장 큰, 3번 논제이다.

<문항 3: 40%, 1200~1400자>
다음 세 제시문을 읽고 각 제시문에 나타난 특징적인 ‘자아’의 모습을 서술하고, [나]의 관점에서 [다]의 관점을, [다]의 관점에서 [나]의 관점을 비판하는 논의를 전개하라.

[가] 원시인에게는 낯익은 것과 낯선 것, 내부 세계와 외부 세계, 삶과 죽음, 혼령과 신체 등을 엄격히 분리하는 도식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영혼이나 몸이나 모두 분명한 경계선을 가진 어떤 특정한 영역으로 보이지 않았다. 원시인은 자기 자신과 자기 주변에서 낯선 다른 힘의 세계를 경험했다. 괴상하게 생긴 바위나 사람의 발길이 닿아본 적이 없는 대초원의 삭막함 등 예외적이고 놀라운 것은 모두 그와 같은 힘의 현존을 뜻할 수 있었다. 영혼 자체도 그런 힘으로 경험되었다. 호흡도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신비스러운 힘의 존재를 보게 한다. 상처받은 몸에서 나오는 검붉은 피, 머리카락, 아무런 표정이 없는 가면의 신비, 소름이 끼칠 정도로 뻣뻣한 시체 등을 모두 낯선 힘의 현존으로 여겼다. …중략…
원시사회 속에서 인간은 자기 홀로 있는 것만으로는 아직 ‘완성된 존재’가 아니었다. 인간은 그가 살고 있는 사회 구조와 뗄 수 없고, 비로소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이 된다. 만일 사회의 구성원 중 한 사람이 죽을 때, 애곡하는 것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죽음으로 사회 구조가 혼란을 받게 된 것을 슬퍼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사실 ‘나’라는 말은 어떤 관계[가령 가족 관계]에서만 사용되기 때문에 단지 ‘나―아버지’, ‘나―삼촌’ 등의 형식으로만 나타난다. 개인은 친족 관계와 집단 관계에서 비로소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한 인격은 여기저기 확산되고, 보다 넓은 관계의 장에서 그가 담당해야 하는 역할과 떨어질 수 없다. 이 관계가 없이, 곧 개인으로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의 행동거지는 사회적?신화적 공간 안에서 결정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내부 세계와 외부 세계, 몸과 영혼을 그렇게 엄격하게 구별해 놓을 수 없다.      
― 반 퍼슨, 『몸쪾영혼쪾정신』

[나] 나는 오직 진리 탐구에 전념하려고 하므로,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전적으로 거짓된 것으로 던져 버리고, 이렇게 한 후에도 전혀 의심할 수 없는 것이 내 신념 속에 남아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우리 감각은 종종 우리를 기만하므로, 감각이 우리 마음속에 그리는 대로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가정했다. 그리고 아주 단순한 기하학적 문제에 있어서조차 추리를 잘못하여 오류 추리를 범하는 사람이 있으므로, 나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고 판단하고, 전에 증명으로 인정했던 모든 근거를 거짓된 것으로 던져 버렸다. 끝으로,  우리가 깨어 있을 때에 갖고 있는 모든 생각은 잠들어 있을 때에도 그대로 나타날 수 있고, 이때 참된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알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정신 속에 들어온 것 중에서 내 꿈의 환영보다 더 참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나는 반드시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이 진리는 아주 확고하고 확실한 것이고, 회의론자들이 제기하는 가당치 않은 억측으로도 흔들리지 않는 것임을 주목하고서, 이것을 내가 찾고 있던 철학의 제1원리로 거리낌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런 다음에, 내가 무엇인지를 주의 깊게 고찰했으며, 이때 다음과 같은 것을 알게 되었다. 즉, 나는 신체를 갖고 있지 않으며, 세계도 없으며, 내가 있는 장소도 없다고 상상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는 없고, 오히려 반대로 내가 다른 것의 진리성을 의심하려고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서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 아주 명백하고 확실하게 귀결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내가 그때까지 상상했던 나머지 다른 것들이 설령 참이라고 하더라도, 내가 단지 생각하는 것만 중단한다면, 내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믿게 할 만한 아무런 근거도 없음을 알았다. 이로부터 나는 하나의 실체이고, 그 본질 혹은 본성은 오직 생각하는 것이며, 존재하기 위해 하등의 장소도 필요 없고, 어떠한 물질적 사물에도 의존하지 않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 나, 즉 나를 나이게끔 해 주는 정신은 물체와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며, 심지어 물체보다 더 쉽게 인식되고, 설령 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정신은 스스로 중단 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 르네 데카르트, 『방법서설』

[다] 접속의 시대는 새로운 유형의 인간을 몰고 온다. 바다의 신이자 변화무쌍한 모습을 가졌던 그리스 신화의 프로테우스처럼 새로운 ‘프로테우스’ 세대의 젊은이들은 전자상거래와 사이버스페이스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사업에 아무런 거부감이 없으며 그 속에서 펼쳐지는 사교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그들은 문화경제를 구성하는 수많은 시뮬레이션 세계에 척척 적응한다. 그들에게 익숙한 세계는 이념적 세계가 아니라 연극적 세계이다. 그들의 의식은 노동 정신보다는 유희 정신에 기울어 있다. 그들에게 접속은 이미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재산도 중요하지만 연결된다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21세기의 인간은 관심을 공유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네트워크의 접속점이라는 의식으로 살아갈 것이고, 다윈이 말한 적자생존의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세계에서 자율적으로 살아가는 주체라고 스스로를 생각할 것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개인적 자유의 의미는 소유권이라든지 남들의 간섭에서 벗어나는 능력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질 것이다. 대신 상호 관계의 그물에 포함될 수 있는 권리로서의 의미가 점점 부각될 것이다. 그들은 접속의 시대를 살아가는 첫 번째 세대이다.
인쇄기가 지난 수백 년 동안 인간의 의식을 바꾸어놓았던 것처럼 컴퓨터는 앞으로 두 세기 동안 인간의 의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심리학자와 사회학자들은 이른바 ‘닷컴’ 세대에 속하는 젊은이들의 정신 발달 과정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벌써 주목하고 있다. 컴퓨터 화면 앞에서 자라면서 많은 시간을 채팅과 전자오락에 쏟아 붓는, 아직은 소수이지만 점점 그 수가 늘어나고 있는 젊은이들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다중 인격자’에 가까워지고 있다. 그들의 의식은, 특정한 시간에 자신이 몸담았던 가상 세계나 네트워크와 어울리기 위해 이용했던 짧은 토막의 파편들로 이루어져 있다. 일각에서는 이 닷컴 세대가 현실을 수시로 바꿀 수 있는 한낱 이야기들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고 우려한다. 주위 세계에 적응하고 주변 사람을 이해하려면 일관된 참조의 틀이 있어야 하는데 이 틀을 형성하는 데 필요한 끈끈한 인간관계의 경험과 참을성 있는 주의력이 이들에게는 부족하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이것을 오히려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사람들이 실제로 접하는 현실 세계는 빠르게 움직이고 정신없이 바뀌는데, 이런 현실을 제대로 수용하려면 사람의 의식도 협소한 굴레에서 벗어나 좀더 발랄하고 유연하고 심지어는 찰나적으로 변할 필요가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 제러미 리프킨, 『소유의 종말』


논제 해설 - 불편부당함 속에 숨은 시선 찾기

왜 [나]와 [다]만 대비하는 것일까?
- [가]의 진정한 취지

대개 학생들은 제시문 [가]에 나타난 자아의 모습을 ‘사회적으로 형성되는 자아’나 ‘인간의 사회적 속성’으로 서술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상식에 따른 해석이겠다. 달리 쓴 답안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때로 상식도 의심할 필요가 있다. 논제를 다시 검토해보면, 이 논제는 [나]와 [다]의 견해 간 차이에 주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왜 그럴까? 왜 [가]의 자아관은 은연중에 외면당하고 있을까?

비밀의 실마리는 각 제시문이 다루는 시대와 관련이 있다. 이 제시문들을 다시 살펴보면, 시대순으로 자아관을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는 원시인들의 자아를 묘사한다. [나]의 자아가 이른바 근대의 자아라면, [다]의 자아는 21세기[현대 및 가까운 미래]에 새롭게 등장하는 자아라 할 것이다. 현대인은 익숙한 근대적 자아관에 따라 한 사람에겐 하나의 뚜렷한 자아관념이 있다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있으나, 인류의 역사를 반추해보면 자아관념 역시 문명의 산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자아관념도 법이나 제도처럼 시대에 따라 변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 [가]의 진정한 취지는 무엇일까? 언어도 제대로 구사할 수 없었던 원시인들이 세계를 판단하고, 해석하는, 독립된 자아관념을 갖고 있진 않았다는 것이 [가]의 진정한 취지라고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에겐 본래부터 자아관념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출제자들은 이렇게 인간의 자아관념은 역사적으로 등장한 것이며, 시대에 따라 변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다.

불편부당함 이면에 숨은 시선을 포착하라
-[나]와 [다] 중 어느 자아관념이 더 문제일까?
우리(=현대인들)는 어떤 지점에 서있는지 한 번 살펴보자. 현대는 근대의 연속선상에 놓여있으며, 다가올 미래에도 한 발을 걸치고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겠지. 그래서 이른바 근대의 자아관과 미래의 자아관 사이에서 바람직한 자아관을 성찰할 때임을 이 논제는 암시한다. 논제는 아주 불편부당한 태도로 ‘[나]의 관점에서 [다]의 관점을, [다]의 관점에서 [나]의 관점을 비판’하길 요구한다. 대개들 외형상으론 성실히 비판을 수행했으나, 이 논제 이면에 놓인 출제자들의 기대를 포착한 학생들은 드물었다. [다]에 등장하는 ‘다중 인격자’라는 말에 주의를 기울이기 바란다.

이중 인격을 넘어 인격이 다중화될 때, 우리는 어떤 ‘나’가 진정한 ‘나’인지 말할 수 있을까? 아마 쉽게 말할 수 없을 게다. 이런 상태를, 익숙한 표현을 빈다면 ‘자아 정체성의 혼란과 위기’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건 결코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지킬박사이면서 동시에 하이드씨인 사회는 정신분열증적인 사회라고 할 수 있겠지. 그래서 [다]에서 묘사되는 ‘자아의 모습’에 심각한 우려를 담은 비판을 수행하는 것이 훨씬 중요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다] 비판에서, 자아정체성의 위기를 정확히 지적하지 않은 많은 답안들은 모두 크게 빗나간 오답들이 되었다. 꽤 많은 학생들이‘자아가 정신이 아니라, 네트워크와 같은 물질에 의존한다고 보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비판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숨어있는 요구 사항 - 자신의 견해가 필요하다
대개의 답안은 [다]의 관점에서 [나]의 관점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은 단락으로 끝맺었다. 언뜻 보면 논제의 마지막 요구사항에 응답하는 성실한 마무리로 보이지만, 좀더 신중한 접근이 필요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나]의 관점 비판보단 [다]의 관점 비판에 무게 중심이 놓여야 한다. 그런 점에서 [나] 비판으로 끝맺는 것은 논지가 역류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다]의 관점 비판 후 [나]의 관점 비판’을 수행했다면, 마지막에 별도의 단락을 두어 이렇게 대립하는 논의를 정리하는 것이 필요했다. 실은 이 논제는 애초부터 이걸 요구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시 한 번 논제를 살펴보자. 놀랍게도 논제는 ‘[나]의 관점에서 [다]의 관점을, [다]의 관점에서 [나]의 관점을 비판하는 논의를 전개’하라고 말한다. 결코 ‘비판하라’는 말로 끝맺고 있는 게 아니다(!). 즉, 두 관점 간 상호 비판을 수행하는 것은 빠뜨리지 말면서, 이 주제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라는 것이다. 익숙한 표현으로 들려주면, ‘이 주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논술하라’는 것이다(!). 그랬기에 (나) 비판으로 끝맺는 답안은 논제의 취지에 크게 못 미치는 답안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설명이 이해되었길 바란다. 차분히 이 해설을 읽어보고 나서 다시 한 번 논제와 제시문들을 보면서, 출제자(들)의 시선을 느껴보기 바란다.

[우수답안]
제시문 [가]의 원시사회는 정신과 육체를 구분하지 않는다. 원시사회에서 개인은 사회의 일부이다. 개인의 자아 역시 사회 속에서 지위를 부여받고 사회 내의 타자와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형성된다. 사회적 공간과 육체, 정신이 상호작용하여 자아가 형성되는 것이다.

반면 제시문 [나]는 정신과 육체를 각각 독립적인 존재로 본다. 제시문 [나]의 데카르트는 모든 진리를 의심하는 방법론적 회의론의 과정에서, 의심을 하는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자아란 사고를 통해 형성되며 물질적인 속성을 띤 육체와는 구분되어 관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철저한 의심을 통해 나의 의식의 세계 내부에 형성된 제시문 [나]의 자아는 외부세계의 영향으로 변질되거나 여럿으로 나뉠 수 없다.

그러나 제시문 [다]는 정보사회를 살아가는 세대들이 가상공간이라는 또 다른 사회를 형성하면서 여러 개의 자아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들의 자아는 여러 곳의 가상 사회를 전전하는 과정에서 단편적으로 형성된다. 이들은 의식을 성숙시키는 것보다 유희를 느끼는데 더 관심이 많다.

제시문 [나]의 회의론에 따르면 사고체계를 갖춰나가기 위해서는 생각하는 나의 존재를 파악하는 것, 즉 확고한 자아가 기본적으로 형성되어야 한다. 그런데 제시문 [다]의 젊은 세대들은 일관된 자아가 형성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이들은 자아 형성을 넘어선 의식의 성숙을 이루기 어렵고 가치관의 혼란을 느끼기 쉽다. 또한 보다 근본적으로, 이들은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기 어렵다. 뚜렷한 자아관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시문 [다]에 언급된 접속의 시대에, 사회는 하루가 멀다 하고 발전과 변화를 반복하고 있으며, 사회 성원들은 새로운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도록 요구받는다. 따라서 제시문 [나]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확고부동한 자아를 가지고 있기보다 그때그때의 변화에 맞추어 융통성 있는 자아를 형성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수 있다. 만약 새로운 사회에 맞추어 자신을 재사회화 시키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사회내의 낙오자로 인식되기 쉬울 것이다.

인간의 자아에 대한 이론은 다양하다. 이들 중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른지 쉽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제시문 [다]에서 예견한 것처럼 가까운 미래에 우리는 접속의 시대를 맞이할 것이다. 그 속에서 자아정체성의 위기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경고는 단순한 의견으로만 받아들이면 안 된다. 이에 대해 ‘대면적인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것과 같은 예방책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가, 인간의 자아를 성찰하는 것도, 사회 문제로 대두할 수 있는 미래의 위기를 미리 진단하고 문제점을 예방하려는 목적에 있기 때문이다.

 

[평가]
논제의 취지에 매우 가까이 다가선 좋은 답안이다. [가]의 취지는 다소 놓쳤으나, 이것을 알아챈 학생들이 거의 아무도 없었음을 고려할 때, 크게 문제가 되진 않았다.
(역으로 [가]의 취지도 놓치지 않았다면, 얼마나 빼어난 답안이 되었을까!)

먼저, 논지의 구성력이 돋보인다. 대개가 놓친, 마지막의 정리 단락을 빠뜨리지 않았다. 각 단락의 분량을 생각할 때, 논지의 엄격한 사전 구상과 분량 안배가 있었음이 드러난다. 좋은 습관이 엿보인다.
[나]와 [다]의 대립관계를 정확히 독해하는 데 성공했다. 간결한 표현으로 긴 제시문들에서 핵심 논지를 추출하여 반대 관점을 비판했다.

결론부에 드러난 자신의 해석이 이 논제의 취지에 정확히 부합한다.
전체 답안들 중에서 대략 상위 1~2% 이내에 드는 우수한 답안이다. 문장 표현도 간결하고 정확하며, 정서법도 잘 지켜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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