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의 핵심]2013학년도 이화여자대학교 논술 출제 경향
[논술의 핵심]2013학년도 이화여자대학교 논술 출제 경향
  • 대학저널
  • 승인 2013.09.27 1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통합교과형 논술 완전 정복⑰

이화여자대학교는 2014학년도 수시모집에서 일반전형으로 총 670명을 선발한다. 이 중 우선선발 비중이 40%, 일반선발 비중은 60%다. 2013학년도에 500명의 인원을 선발한 것에 비해 인원은 170명이나 늘어났다. 전년에 비해 스크랜튼(자유전공)학부 지원자들도 논술고사를 치러야 한다.

전형요소를 살펴보면 학생부(교과)가 30%, 논술 비중이 70%이므로 다른 대학들에 비해 논술이 차지하는 비중이 큰 편에 속한다. 2012학년도부터는 인문계 논술이 인문계열 I과 인문계열 II로 분화가 되었다. 인문계열 I은 인문과학부, 의류학 전공, 사범대학(인문)을 지원하는 학생들이 치르게 되고 인문계열 II는 사회과학대학과 경영학부를 지원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다. 논술고사 시험방식은 다음과 같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2012학년도부터 계열별로 출제되는 만큼 기출문제나 예시문제를 찾아 직접 검토하고 문제의 유형과 특징을 숙지해야 실전에서 낭패를 보지 않을 것이다. 인문계열 I 논술문제에 등장하는 영어지문은 그리 어려운 편은 아니니 적극적인 독해자세가 필요하다. 일정한 수준의 영어 실력을 점검하려는 학교 측의 평가 의도가 있는 만큼, 영어지문을 대충 지나쳐선 안된다. 인문계열 II에 포함된 수리 논술 문제는 편의상의 호칭일 뿐, 자연계열의 수리 논술 문제들과는 크게 다르다. 수학 지식을 깊이 요구한다기보다는 수리적 접근방법을 확인하려는 의도가 훨씬 강하다. 그러니 수학이 약하다고 해서 두려워할 정도는 아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니 최근 기출문제와 예시문제들로 확인해보자.

>> 이 달의 미션

2013학년도 이화여대 논술 예시문제(인문계열 I)로 연습해보자. 고사시간이 100분이니 시간 안배에 특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시간 부족으로 미처 문제 3에 답하지 못하는 일이 있어선 안되겠지. 이화여대는 각 문제에 배점만 있고, 규정자수 제한은 없다. 밑줄이 그어진 일정한 크기의 답안지에 답안을 작성해야 한다. 지나치게 작은 글씨로 가득 채우면 생각보다 훨씬 많은 양이 담기게 된다. 그러니 1번 문제 답안을 너무 길게 쓰면 아마도 시간 부족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보통 크기의 글씨로 문제별 답안지의 3/4 정도를 넘기는 정도를 목표로 하기 바란다. 줄글인 경우, 가급적이면 문단 전환을 보수적으로 하는 편이 낫겠다. 잦은 문단 전환은 지면의 낭비와 가독성을 떨어뜨릴 위험성이 크다. 해설과 예시답안을 보기 전에 문제와 제시문들을 꼼꼼히 독해한 후 직접 작성해보는 수고가 있길 바란다.

[1 ~ 3]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가] 동정은 삶의 에너지를 고양시키는 격정과 대립되며 오히려 삶에 대해 억압적으로 작용한다. 우리는 동정할 때 힘을 상실한다. 힘을 상실한다는 것은 그만큼 이미 삶에 괴로움을 초래하는 것이지만, 동정에 의해서 그것은 더욱 더 증대되고 더욱 더 복잡해진다. 괴로움 자체는 동정을 통해서 전염성을 지닌다. 경우에 따라서는 동정 때문에 원인에 비해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고통의 양이 증가되어 삶의 에너지가 전체적으로 손실될 수도 있다. 나아가 동정이 항상 일으키는 여러 가지 반작용을 측정해본다면 삶을 위태롭게 하는 동정의 성격이 훨씬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대체로 동정이란 발전의 법칙을 가로막는다.

그것은 몰락으로 나아가야 할 것을 보존하려 한다. 동정은 삶의 상속권을 박탈당한자, 삶의 죄인으로 규정된 자를 위해서 싸운다. 동정이 삶 속에 온갖 종류의 패잔병을 가득 차게 함에 따라 동정은 삶 자체에 암담하고 기괴한 모습을 부여한다. 사람들은 일부러 동정을 하나의 덕이라고 불러왔다. 그러나 모든 고귀한 도덕에 있어서는 동정은 허약한 것이라고 간주된다. 나아가 사람들은 동정을 덕 그 자체로 여기고 모든 덕의 토대와 근원으로 삼았다. 물론 그런 관점은 허무주의적인 철학, 삶의 부정을 그 간판으로 내걸었던 철학적 견지를 반영한 것이다. 이 점에서 쇼펜하우어는 정당하다고 본다.

동정에 의해서 삶이 부정되기 때문이며, 나아가 한층 더 부정당할 만한 것으로 되기 때문이다. 동정은 허무주의의 실천인 것이다. 그와 같은 억압적인 전염성의 본능은 삶을 보존하고 삶의 가치를 고양시킬 것을 목적으로 하는 모든 본능을 가로막는다. 동정은 비참을 증가시키는 방식으로든 아니면 모든 비참한 인간을 보존시키는 방식으로든 퇴폐를 심화시키는 하나의 주된 도구이다. 동정은 허무를 설복시킨다. ‘허무’를 말하지 않고 대신 ‘피안(彼岸)’이라고 말하거나 ‘신’이라고 말하거나 혹은 ‘진실한 삶’이라고 말한다. 또는 ‘열반(涅槃)’이나 ‘구원’ 또는 ‘축복’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종교적·도덕적 특질의 영역에서 나온 이러한 사사로움 없는 수사도 그러한 숭고한 말의 외투 속에 어떤 경향이 감추어져 있는가를 이해한다면, 그다지 사사로움이 없는 것으로 보이지 않게 된다. 즉 그것들은 삶에 대한 적의(敵意)를 지니는 경향이 있다. 쇼펜하우어는 삶에 대한 적의를 품고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동정이 덕으로 되었던 것이다.

[나] If we think of a caring person as having a virtuous disposition* instead of as engaging in a caring relational practice, we are likely to overlook the feelings of the person who is taken care of. To continue to have strong feelings of affection for someone who does not want those feelings but wants rather to be left alone, can be a failure of care. It fails to constitute a caring relation. On the other hand, a young person trying to distance himself from an overly concerned parent may actually welcome continuing affection despite the appearance of disdaining** it. Both parent and child may acknowledge that the solid caring relation needs reinterpretation to allow for greater mutual understandings.

Another limitation lies in seeing care as a virtue when we ask how caring should be. The person who tries to be caring but is instead selfless to the point of lacking self-respect, can be criticized as failing to have the necessary virtue. The servile housewife, the martyr*** mother, aspire to virtue but miss it. The servile housewife contributes to the macho husband and tyrant father who disdain her. The martyr mother produces children who face the world presuming they deserve deference. The person who participates in an admirable practice of care will not only respect himself or herself but will foster mutual respect and mutual autonomy.
* disposition 성향, 기질 ** disdain 경멸하다
*** martyr 순교자

[다] 공통의 인간욕구를 바탕으로 한 이익집단이 동정심을 통해 단단하게 뭉쳐진다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은 동정심이 이해관계의 공동체를 넘어서기가 어렵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여기에는 기본권의 토대로서 동정심이 갖는 한계가 암시되어 있다. 동정심은 기본권을 부정하는 과정의 일부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기본권의 원천으로서 동정심에 내포되어 있는 이 같은 난점은 린치행위 사례를 들여다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과거 미국 남부에서 흑인에 대하여 린치를 가하는 관습이 법적으로 허용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지위 향상을 막기 위해 사회적으로 용인된 수단이었다. 린치를 가하는 관습은 1960년대 초 까지 남부 사회의 한 단면을 이루고 있었다.

린치행위는 사회체계의 일부로서 흑인들이 그것을 거부할 권리를 요구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억압적 기능을 수행했다. 그 부담이 너무 컸기 때문에 흑인들은 린치를 당하더라도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 이처럼 린치행위가 사회통제의 관례적인 수단처럼 작용하는 상황에서, 흑인의 기본권에 동정심을 가지고 그들에 대한 린치에 반대하는 일부 백인들이 있었다. 이들의 동정심은 짧게나마 상당한 정도로 누적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이 흑인에 대한 백인의 동료의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일부 백인 사이에 퍼져있는 동정심조차 사실상 흑인의 기본권을 부정하는 린치행위의 일부로 존재하는 것이었다. 린치를 가하는 백인 폭도들에게 대항하여 흑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은 거의 없었다. 경찰서와 같은 법적 보호장치에 호소할 경우 폭도들은 이를 흑인의 권리 주장으로 간주했고, 따라서 린치 폭력이 더욱 심해질 가능성이 컸다. 따라서 린치가 가해지는 동안에 흑인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동정심을 보이는 ‘백인친구’에게 보호를 요청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관행조차도 린치행위라는 관습의 일부로서 간주되는 것이었고, 사회통제 체계 속에서 린치행위가 지속되게끔 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었다.

기본적인 안전을 위해 흑인이 백인의 동정심에 의지하는 것은 백인의 우월성과 흑인의 굴종 모두를 지속적으로 강화했다. 동정적인 ‘백인친구’의 보호를 받는 과정에서 흑인은 자신의 권리가 백인의 권위와 후견 하에서 보장된다는 점을 백인에게 입증해주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 이를 확신시키곤 했다. 백인의 동정심에 신세를 진 흑인은 린치행위를 포함하여 여하한 형태의 백인지배에 저항하지 않겠다는 암묵적인 약속을 해야만 했다.

[라] 어떤 단어의 반의어가 시대에 따라 다르게 규정되기도 한다. ‘명랑’의 경우가 그렇다. 지금이야 누구나 명랑의 반의어가 ‘우울’이라는 사실에 고개를 끄덕일 테지만, 역사를 되돌아보면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1990년대 이전까지 명랑은 지금과는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그 기원은 1930년대 총독부의 명랑화 정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총독부가 내세운 도시 명랑화 정책의 경우, 이때 명랑의 반의어는 ‘불결, 불량, 오염, 범죄, 퇴락, 퇴보’ 등이 될 것이다. 그런데 1930년대에 명랑의 반의어로 사용된 말은 그 외에도 더 있다. ‘불온 지대 명랑화’나 ‘소리판을 명랑케, 난잡을 배격’과 같이, 이 시기 명랑과 함께 자주 등장했던 말에는 ‘저급, 퇴폐, 난잡, 침울, 불온’ 등과 같은 말도 있었다.

이런 말들을 보면 총독부가 명랑화를 내세운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즉, 이 시기 총독부가 내세운 명랑은 ‘건전’의 동의어로서 체제에 저항하는 것들을 억압하고 체제가 요구하는 인간만을 양성하기 위한 규율 담론이었던 것이다. 총독부는 식민지 경영에 방해가 되는 것에 대해 저급하고 난잡하며 퇴폐적이고 불온하다
는 딱지를 붙였다. 그와 반대로 체제 순응적인 감정과 가치는 모두 명랑이라는 코드 안에 편입시켰다. 그러자 명랑은 개인의 기질이나 성격을 드러내는 표현을 넘어 ‘좋은 것’을 의미하는 절대적 윤리가 되었다. 총독부뿐만 아니라 조선인들도 ‘우리의 생활을 명랑화하자’와 같은 주장을 외쳤고, 심지어 상품광고에서도 명랑화라는 표현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유머 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나타난 것도 이즈음이었다. ‘폭소 소설’이나 ‘명랑 소설’이라는 명칭이 붙기도 했던 유머 소설은 단편소설보다 짧은 분량에 즐거움과 웃음, 명랑한 전망을 담은 가벼운 읽을거리였다. 1930년대 들어 신문과 잡지 등 대폭 늘어난 매체들은 독자를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대중의 기호와 정서에 영합하는 선정적이고 가벼운 내용의 비중이 늘 수밖에 없었다. 유머 소설이 1930년대 내내 지속적으로 창작된 것도 그러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매체의 상업성이 강화된 것이 유머 소설이 유행하게 된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1930년대는 도시화, 자본주의화, 대중문화의 형성 등 근대적 변화가 일어난 시기인 동시에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경제난과 실업난이 가중되고 침략 전쟁을 위한 일제의 통제가 강화되어 가던 시기였다. 명랑은 식민지인과 근대인이 갖춰야 할 필수 조건이 되었지만, 정작 실제로 명랑해질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오히려 명랑이라는 허울을 한 꺼풀만 벗겨내면 깊은 절망과 우울이 조선 전체를 휘감고 있었다. 강요된 웃음과 절망적 현실이라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아이러니한 현실이 당시 대중 앞에 놓여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유머 소설은 잠시나마 현실의 질곡에서 벗어나 마음껏 웃을 수 있는 도피처였다.

[마] 천하의 강산은 크고 고금의 세월은 유구하구나. 인간사의 가고 옴은 하나도 같지 않고 생물은 형형색색 만 가지로 같지가 않다. 산은 본래 하나이나 만 갈래로 흩어져 서로 다른 산이 생기고, 물은 만 줄기가 끝내 하나로 모인다지만 일만 굽이가 다르다. 하늘로 날고 강물에 잠긴 동식물의 기이한 형상도 그 같고 다름이 조화의 자취가 아닌 것이 없다. 인간은 태어날 때 음양과 오행의 정기를 받아 만물보다 사랑스럽다. 하지만 남자와 여자의 다름, 능력의 높고 낮음, 식견의 크고 작음, 오래 사는 자와 요절하는 자, 가난한 자와 부귀한 자로 나뉘어 서로 같지가 않다. 때를 얻어 임금을 섬기고 백성들에게 은택을 끼쳐 이름이 역사에 남는 사람도 있고, 시대를 잘못 만나 귀한 구슬을 지닌 채로 초목과 함께 썩은 사람도 있다.

이중에 여자는 발이 규방(閨房)의 문을 나가지 못하고 오직 술과 음식 만드는 일만을 의논하는 것이 옳다고 했으나, 옛날의 성현이었던 문왕과 무왕, 공자와 맹자의 어머니에게는 모두 성스런덕이 있었고 또 성현을 낳아 이름이 만세에 드러났다. 이렇게 빛나는 일을 이룬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어찌 여자들 중에서도 뛰어난 사람이 없겠는가? 큰일을 이루지 못하면 규중에 깊숙이 묻혀 그 총명함과 식견을 넓힐 수 없고 끝내는 사라져 버리게 될 것이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나는 본래 강원도 원주 사람으로 스스로를 금원(錦園)이라 호를 지었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이 나를 어여삐 여겨 글을 가르쳐주시니 몇 년이 되지 않아 경서와 역사서를 약간이나마 알게 되었고 고금의 문장(文章)을 본받고 싶어져서 이따금 흥이 날 때마다 꽃
과 달을 읊조리며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태어날 때 금수(禽獸)가 되지 않고 사람이 된 것이 다행스럽고, 오랑캐 땅에 태어나지 않고 문명(文明)한 우리나라에 태어난 것이 다행스럽다. 그러나 남자가 되지 않고 여자가 된 것은 불행하고 부귀한 집에 태어나지 않고 한미한 가문에 태어난 것은 불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하늘이 이미 나를 낳았으니 어찌 홀로 요산요수(樂山樂水)하여 보고 듣는 것을 넓힐 수 없겠는가? 여자로 태어났다고 해서 집안 깊숙이 문을 닫아 걸고 사는 것이 옳겠는가? 한미한 집에 태어났으니 형편을 좇아 분수껏 살아가는 것이 옳겠는가? 아아! 내 뜻은 결정되었다. 나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 기수(沂水)에서 목욕하며 바람을 쐬고 글을읊었던 증점(曾點)을 본받는다면 성현들께서도 또한 마땅히 장한 일이라 할 것이다.’

이에 마음을 굳게 먹고 부모님께 여러 번 간청하니 한참 뒤에 내 뜻을 허락해주셨다. 이에 가슴이 툭 트이는 것이 마치 매가 새장에서 나와 곧장 하늘로 날아가는 듯하고 천리마가 재갈에서 풀려나 천 리를 치닫는 듯했다. 그 날로 당장 남자 옷으로 갈아입고 짐을 꾸려 먼저 충청도의 네 고을을 향해 길을 떠났다.

[바] 수용소에서 일할 때에도 우리는 종종 옆에서 일하는 동료들과 눈을 돌려 바바리아 숲의 아름다운 큰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살과 풍경을 바라보곤 했다. 뒤러의 수채화처럼 아름다운 그 숲은 우리가 대규모 비밀 군수품 제조공장을 짓는데 동원되었던 바로 그 장소였다. 죽도록 피곤한 몸으로 막사 바닥에 앉아서 수프그릇을 들고 있는 우리에게 동료 한 사람이 달려왔다. 그리고는 점호장소로 가서 해질녘의 멋진 풍경을 보라고 소리쳤다. 우리는 밖으로 나가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반짝이는 구름 사이로 새파란 빛과 핏빛 하늘의 조화가 신비롭게 어우러져 있었다. 진흙바닥에 패인 웅덩이에 반사된 하늘빛의 조화는 칙칙한 분위기의 초라한 임시막사와 절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침묵 속에서 감동의 물결이 잠시 요동친 후 누군가 외쳤다.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다니!”

어느 날 우리는 참호 속에서 일하고 있었다. 잿빛 새벽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우리 위에 있는 하늘도 잿빛이었고, 창백한 새벽빛에 반사되는 눈도 잿빛이었다. 동료가 걸치고 있는 넝마 같은 옷도 잿빛이었고, 얼굴도 잿빛이었다. 나는 또 다시 아내와 침묵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당시 나는 내 고통에 대한, 그리고 내가 서서히 죽어가야 하는 상황에 대한 정당한 ‘이유’를 찾으려고 애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곧 닥쳐올 절망적인 죽음에 대해 마지막으로 격렬하게 항의하고 있는 동안, 나는 내 영혼이 사방을 뒤덮고 있는 음울한 빛을 뚫고 나오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것이 절망적이고 의미 없는 세계를 뛰어넘는 것을 느꼈으며, 삶에 궁극적인 목적이 있는가라는 나의 질문에 어디선가 “그렇다”라고 하는 활기찬 대답 소리를 들었다.

바로 그 순간 수평선 저 멀리에 그림처럼 서 있던 농가에 불이 들어왔다. 바바리아의 동트는 새벽의 초라한 잿빛을 뚫고 불이 켜진 것이다. “어둠 속에서도 빛은 있나니.” 빛은 어둠 속에서 빛났다. 나는 몇 시간 동안 얼어붙은 땅을 파면서 서 있었다. 감시병이 지나가면서 욕을 했고, 나는 또 다시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자 점점 더 그녀가 곁에 있는 것 같이 느껴졌으며, 그녀는 정말로 내 곁에 있었다. 그녀를 만질 수 있을 것 같았고, 손을 뻗쳐서 그녀의 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이 너무나 생생했다. 그녀가 정말로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새 한 마리가 날아와 내가 파놓은 흙더미 위에 앉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나를 바라보았다.

1. 제시문 [가]에 나타난 ‘동정’에 대한 시각을 통해 제시문 [나]에 나타난 ‘돌봄(care)’의 행위를 분석하시오. [30점]
2. 제시문 [다]와 [라]의 내용을 요약한 후, 그것을 토대로 감정의 역할이 지닌 공통점을 서술하시오. [30점]
3. 아래 인용문을 바탕으로 제시문 [마]와 [바]에 나타난 삶의 태도를 설명하시오. [40점]

세상을 대하는 태도에는 ‘사냥터지기’의 자세와 ‘정원사’의 마음가짐이 있다. 사냥터지기의 주요 임무는 관리하도록 맡겨진 땅을 인간이 간섭하지 못하도록 지키는 것이다. 이른바 땅의 자연적 균형, 즉 신이나 자연의 무한한 지혜의 체현물을 보호하고 보존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그의 임무는 그런 자연의 균형이 영구적으로 보존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밀렵꾼의 덫을 찾아내 못쓰게 하고 낯선 불법 사냥꾼이 침입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사냥터지기의 일은 만사는 어설프게 손댈 바에야 손대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는 신념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정원사는 그렇지 않다. 그는 자기가 끊임없이 보살피고 노력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는 질서가 없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정원사는 자기가 가꾸는 정원에 어떤 종류의 식물이 자라야 하고, 어떤 식물이 자라면 안 되는지 더 잘 안다. 그는 우선 머리에 바람직한 배치도를 마련한 다음에 정원을 그 이미지에 맞춘다. 그는 적합한 종류의 식물들을 성장하도록 하고, 그 외의 식물들, 즉 이제는 ‘잡초’라 개명된 것들은 뿌리를 뽑아 버림으로써 대지에 자신이 미리 생각해 놓은 디자인을 실행한다.

>> 논제 해설

논술능력은 사실 문제에 따라 달라지는 게 아니다. 여대 문제라는 이유만으로 여대 기출문제들을 보지 않은 학생들도 있을 것이다. 대학저널을 통해 매달 한 편의 논제를 접해온 학생들을 위해 잘 만든 이화여대 논술고사 문제를 함께 파악해보자. 아래 해설은 출제자들의 시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 학교 측의
상세한 설명을 원용하였다.

문제를 살펴보면, 이 제시문들은 인간의 ‘감정’에 대해 복합적이고 입체적으로 재고해 볼 수 있는 내용들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출제자들은 흔히 긍정적인 미덕으로 간주되는 ‘동정’, ‘돌봄’, ‘명랑’ 등의 감정을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하길 요구한다. 이 과정에서 제시문들에 대한 폭넓은 이해력과 깊이 있는 사고력을 평가하려는 것이 이 논제들 이면에 놓인 출제의도인 것이다. 또한 감정 자체를 개인적인 호오(好惡)로만 간주하는 평면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집단적 이해나 지배 이데올로기에 종속될 수 있는 가능성을 의심하게 해봄으로써 비판적 사고력을 측정하려는 의도도 분명히 드러난다.

문제 1 : 제시문 [가]와 [나]는 통상적인 관점에서 미덕으로 여겨졌던 ‘동정’과 ‘돌봄’이라는 행위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글로서, 이 문제는 동정과 돌봄에 대하여 객관적이고도 냉철한 시각으로 상식적 도덕관을 넘어선 분석을 해낼 수 있는 능력을 평가한다. 두 글의 연관성에 기초하여, 동정과 돌봄 모두 행위자와 피행위자의 입장이 고루 고려되지 않았을 때 생길 수 있는 문제점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더불어 쌍방 모두의 능동적 발전 가능성에 기여하는 돌봄의 조건이 무엇인지 또한 포괄적으로 분석해 낼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하는 문제이다. 이를 위해 영어제시문인 [나]에 대한 독해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문제 2 : [문제1]이 ‘동정’과 ‘돌봄’의 행위가 지니는 사적·개인적·내면적·심리적 차원에서의 부정적 역할에 대해 고찰하는 것이었다면, 이 문항은 ‘동정심’이나 ‘명랑’과 같은 감정이 지닌 공적·집단적·사회적·정치적 차원에서 어떻게 이데올로기화 할 수 있는지 그 위험성에 대해 제시문 [다]와 [라]에서 구체적으로 논하고 있음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제시문 [다]와 [라]에서 설명하고 있는 동정심과 명랑의 역기능을 각각의 제시문을 통해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지 독해력과 이해력을 평가한 후, 그것을 토대로 두 가지 감정의 이데올로기화가 지니는 공통점을 논리적으로 유추해내는 능력을 평가하려는 것이 이 문제의 출제의도이다.

문제 3 : 추가된 인용문을 근거로 삼아 제시문 [마]와 제시문 [바]에 나타난 삶의 태도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가를 측정하는 문제이다. 추가된 인용문은 기존의 세계를 그대로 수용하려는 소극적인 ‘사냥터 지기’의 태도와 미래에 대한 전망과 계획에 따라 세계를 적극적으로 개선시키려는 ‘정원사’의 태도를 대비시키고 있다. 또한 제시문 [마]는 남성주도의 조선사회에서 여성에게 주어진 유폐된 삶을 거절하고 넓은 세상에서 자유롭게 살고 싶은 욕망을 표현하였으며, 제시문 [바]는 강제수용소라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인간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희망을 좇아 절망적인 세계를 극복하려는 갈망을 표현하였다. 따라서 제시문 [마]와 제시문 [바]는 모두 정원사의 태도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논제 1 우수답안)

제시문 [가]는 동정을 미덕으로 여기는 시각이 삶을 부정하는 허무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며 동정을 비판한다. 이글에 의하면 동정은 우리 삶의 힘을 상실하게 하며, 삶 속에 온갖 나약한 패잔병들을 존속시킴으로써 삶 자체에 암담, 기괴, 비참한 모습을 증가시키며 발전의 법칙을 가로막는다. 제시문 [나]는 동정과 마찬가지로 미덕으로 여겨지는 돌봄이 잘못 행해졌을 때의 부정적 효과를 구체적으로 예시하고 있다. 돌봄을 단순히 덕스러운 성격에서 오는 것이라고 여기게 되면 상대방의 기분을 고려하지 않은 채 행위자의 입장에서만 일방적으로 돌봄을 행함으로써 오히려 폐가 될 수도 있다. 또한 돌봄을 미덕이라 여겨 행위자 자신의 자존감 및 자주성을 포기할 경우, 복종적인 아내나 순교자적인 어머니가 오만하고 독재적인 남편, 아버지, 아들을 양산하듯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제시문 [가]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에 제시문 [나]는 동정심에 기초하고 있으며 역시 미덕으로 간주되는 돌봄도 행위자 및 피행위자의 삶의 태도를 무력하게 하며 그들의 발전으로 인도하지 못한다면 위험할 수 있음을 구체적으로 예시해 준다. 위에 열거된 인물의 예는 제시문 [가]에서 언급하고 있는 삶의 암담한 모습의 한 단면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제시문 [나]는 이러한 돌봄의 부정적 모습만을 그리는 데에서 끝나지 않고 돌봄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한 전제 조건을 제시해 준다는 점에서 제시문 [가]와 차이가 있다. 제시문 [나]에 의하면 돌봄은 첫째로 피행위자의 의사를 충분히 반영하여 상황에 맞게 적용되어야 하며, 둘째로는 행위자 자신의 자존감과 자주성을 지켜내는 가운데 행해져야 한다. 이처럼 돌봄 행위는 행위자와 피행위자의 상호 이해 및 상호 주체성에 근거하여 쌍방 모두의 삶을 고양시킬 때에만 긍정적 인간관계 형성에 기여할 것이다.

(평가)

이 답안은 먼저 두 제시문의 내용을 명확히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며, 이를 바탕으로 제시문 [나]에 묘사된 돌봄 행위가 제시문 [가]에서 설명하는 삶의 힘을 상실하게 하고 발전을 가로막는 구체적 예가 될 수 있기에 위험함을 지적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제시문 [가]에서 언급하고 있지 않은 이러한 동정적 행위가 제대로 기능하기 위한 조건을 제시문 [나]에서 찾아내어 제대로 된 돌봄 행위란 행위자와 피행위자 사이의 상호 이해 및 주체성이 전제되어야 함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논제 2 우수답안)

제시문 [다]에서는 집단의 결속 강화라는 순기능을 담당하는 동정심이 한편으로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이익을 대변하는 역기능도 담당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가령 미국에서 행해지는 흑인에 대한 린치행위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흑인에 대한 린치에 반대하는 백인은 보다 우월한 위치에서 흑인에 대한 동정심을 발휘하는 것뿐이기에 진정한 동료의식을 오히려 약화시키면서 흑인의 기본권마저 박탈시킬 위험성마저 내재한다. 이런 백인들의 동정심을 받는 흑인들 또한 그런 ‘고마워해야 할’ 백인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기에 그들에게 저항할 명분을 상실하면서 더욱 굴종할 수밖에 없게 된다. 제시문 [라]에서 제시된 1930년대 일제식민지하의 명랑화 정책 또한 이와 유사하다. 일본은 억압적인 현실로 인해 전혀 명랑할 수 없는 한국인들에게 억지로 명랑함을 강요하거나 주입함으로써 우울하고 절망적인 현실로부터 도피하도록 조장하였다. 이런 상황이기에 명랑의 반대말이 ‘불결, 불량, 오염, 범죄, 퇴락, 퇴보’가 되거나 ‘저급, 퇴폐, 난잡, 침울, 불온’ 등이 되었다. 명랑하지 않으면 불건전하게 부도덕하게 취급당했기 때문이다. 이런 명랑함의 강조를 통해 일본은 자신들이 원하는 바대로 한국인들의 감정을 통제하기 쉽게 조절하려고 했다.

이런 사례들을 통해 볼 때 제시문 [다]와 제시문 [라]에 나타난 감정의 역할은 두 가지 측면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첫째는 감정 자체가 개인의 사적인 차원에서의 문제가 아니라 집단의 공적인 차원에서의 문제라는 것이다. 감정이 감정 자체가 아니라 사상이나 이념을 내포하거나 대변하는 역할을 담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감정을 어떻게 느끼는가 하는 문제도 시대와 사회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두 번째 공통점은 그렇게 사회화되고 정치화된 된 감정이 지배자의 억압이데올로기를 강화하거나 피지배자의 종속을 초래하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순수한 감정도 공동체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에 악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제시문 [다]와 제시문 [라]에서 논의되고 있는 동정심과 명랑과 같은 감정이 맡은 역할의 공통점은 공적이고 사회적 역할과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평가)

이 답안은 문제에서 요구한 두 가지 내용, 즉 제시문 [다]와 제시문 [라]에 대한 요약과 두 제시문 속 감정의 역할이 지니는 공통점을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요약한 내용을 토대로 공통점을 유추해냄으로써 논리적 비약이나 모순 없이 두 제시문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있음이 잘 드러난다. 즉 감정이 지니는 사회적 기능과 그 역기능의 동시성과 양면성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제시문 [다]의 내용을 꼼꼼하게 제대로 파악해서 백인과 흑인 모두에게 왜 동정심이 둘 사이의 평등한 관계형성에 오히려 해가 되는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답안은 두 제시문의 공통점을 집단의 공적인 차원과 이데올기적 기능으로 분리하여 서술하여 세심한 독해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논제 3 우수답안)

인용문은 주어진 세계를 이상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그것을 지키려는 사냥터 지기의 태도와 대면한 세계의 결함을 수정하여 더욱 바람직한 세계를 만들려는 정원사의 태도를 설명하였다.

둘의 태도는 마주한 세계를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냐 아니면 적극적으로 개선할 것이냐의 차이를 기준으로 삼고 있다. 한편, 제시문 [마]는 규방의 여성으로 태어난 금원이라는 주인공이 타고난 총명과 식견을 넓힐 수 없도록 하는 삶의 부정적 조건에 대항하여 넓은 바깥 세계로 나아가 자유롭게 살고 싶은 모습을 표현하였다. 남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뛰어난 여성이 있었다는 점, 여성이 규중에 깊숙이 묻힐 경우 총명과 식견을 넓힐 기회가 없다고 자각한 점이 금원이 깨달은 내용의 핵심이다. 그래서 그녀는 한미한 가문의 여성으로 태어난 삶의 조건에 굴하지 않고 ‘매가 새장에서 나와 하늘로 날아가듯’ 과감히 세상을 향해 길을 떠날 수 있었다. 제시문 [바] 역시 절망적인 죽음에 직면한 ‘잿빛’ 음울한 세계에서 삶의 궁극적인 목표와 희망을 상징하는 ‘빛’을 발견하고 감시와 절망의 한계를 뚫고 나가려는 ‘나’의 적극적 태도를 묘사하였다. 감시병의 감시 속에서 새벽까지 참호에서 일하고 있던 ‘나’가 ‘서서히 죽어가야 하는 상황’에 대한 이유를 찾으려고 애쓰는 모습은 매우 비극적이다.

하지만 죽음에 대해 격렬하게 항의하며 삶의 궁극적인 목적을 자문하는 대목과 수평선의 농가에서 켜진 불빛을 통해 ‘어둠속에서 빛나는 삶의 불빛’을 깨닫는 대목은 절망 속에서 희망을 향해 비상하려는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보여준 것이었다. 따라서 [마]와 [바]의 인물은 모두 삶의 속박과 구속에 맞서 자신의 꿈과 의지를 향해 나아가려고 했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금원은 남녀가 차별화되는 사회적인 제약에 맞섰으며 참호에서 일하고 있던 ‘나’는 감시와 죽음의 절망적인 상황에 맞섰다. 그들은 주어진 삶에 순응하기보다는 그 너머에 있는 희망의 세계로 새처럼 날아가기를 갈구했다. 그러므로 제시문 속의 두 인물들은 인용문에 나타난 정원사의 태도를 지녔다고 판단할 수 있다.

(평가)

이 답안은 인용문에 대한 정확한 독해에 성공했다. 삶에 대한 태도를 기준으로 삼아 사냥터 지기와 정원사의 삶에 대한 태도 차이를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다. 마주한 세계에 순응할 것이냐 아니면 그 결함을 적극적으로 개선할 것이냐를 기준으로 사냥터 지기의 태도와 정원사의 태도를 변별한 것이 정곡을 파악한 견해이다. 제시문 독해도 정확했다. 삶의 부정적 조건에 대항하여 자유로운 여성으로 살기를 바랐던 금원의 태도를 예리하게 추출하고 있으며 또한 금원이 깨달았던 것이 무엇인지를 적절하게 짚어내었다. 또한 제시문 [바]에서 절망적인 죽음에 직면한 ‘잿빛’의 음울한 세계, 감시와 절망의 한계를 뚫고 희망의 빛을 발견하는 모습을 적절하게 포착하였다.


관련 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