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번 읽기만 하는 것보단 한 편의 논술문을 직접 써보는 게 낫다"
"여러 번 읽기만 하는 것보단 한 편의 논술문을 직접 써보는 게 낫다"
  • 대학저널
  • 승인 2016.08.30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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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의 핵심] 통합교과형 논술 완전 정복 - 서강대학교편

『거꾸로 읽는 세계사』란 책이 있었더랬다. 비문학 시장에서 개정판, 증보판을 내면서 수십 쇄나 계속 찍어냈으니 저자는 얼마나 행복했을까? 사실 이 책은 작가 입장에선 부끄러워할 만한 책이었다. 초간본 서문에서 저자가 부끄러워해야 하는 이유의 일단을 찾아볼 수가 있는데, 그건 이 책 내용이 거의 다른 책들의 표절과 요약에 그쳤기 때문이야. 초기 판본에선 한동안 십여 권의 원작들 출처도 밝혀주고 있었는데, 그걸 일일이 대조해 보면 이 책에 쓰인 십여 개의 장들이 모두 원작들의 내용을 발췌하여 짜깁기한 것임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단 말이야.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많은 독자들이 다이제스트는 쉽게 읽어도 원작들을 일일이 읽기는 힘드니 이런 사실들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이 저자는 대단히 박식한 인물이란 평가가 뒤를 이었지. 물론 새겨볼 만한 이야기들을 약식 모음본으로 편집하는 것도 의의는 있지. 그런데 발췌요약과 하나의 주제로 오랜 취재와 자료조사를 통해 짜임새 있는 책을 저술하는 건 크게 다르다는 거지. 나중엔 이 작가도 나름대로 애를 많이 썼던 것 같아. 이오덕 님의 우리말 바로 쓰기 정신에도 공감하여 일본어 잔재도 걷어내고 해서 자신의 컬러를 다시 입히려는 노력도 꽤 기울였거든.

그런데 요즘엔 시류에 편승하는 서적으로 상업적인 저술도 쓰더라고. 유 모씨의 글쓰기 특강이니 유 모씨의 논술특강이라는 제목의 책이 그거야. 인세 수입원을 확대하려는 사특한 의도를 가진 것만은 아니겠지만, 적은 시간을 들여 단숨에 책 한 권으로 내용을 부풀려 재빨리 출간하는 힘은 참 대단한 것 같아. 꾸준히 내공을 갈고닦을 요량으로 읽어보았더니, 곱씹어볼 좋은 대목들도 있지만 위험한 서술들도 눈에 띄더라고. 섣부른 이분법이나 편견들은 걷어내고 읽는 게 필요하겠어. 무릇 책들은 비판적으로 읽는 게 필요하다는 걸 다시 한 번 절감했지. 이 책에서 유 씨는 대치동의 유명 논술학원을 희생양으로 삼더라고. 논제와 제시문 독해도 제대로 못해서 예시답안이라고 작성한 것이 C등급의 보잘 것 없는 수준에 그친다고 혹평을 하더군.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실제 그 익명의 예시답안 작성자는 설령 선의를 가졌어도 역불급이었을 수도 있지. 그런데 어떻게 한 두 편의 글로 그의 실력이나 자질을 단정할 수 있을까? 좋은 논술 선생님들도 우리 주변에 꽤 있지 않을까? 유 씨의 그 논술특강이라는 책들도 논술정보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을 현혹하는 그렇고 그런 논술책들 중 하나가 아닐까?

다만 사교육 논술교습에 대한 불신과 매도가 지나친 수준이라서 이건 저자의 편견일 뿐 공정한 시선이라고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군. 한국 현실에선 참으로 사교육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교육이라고 하면 너무 동네북처럼 취급하는 게 거의 맹목 수준 아닌가 싶더란 말이야. 좋은 공교육, 나쁜 사교육이 있는 게 아니라, 좋은 교육과 나쁜 교육이 있는 게 아닐까? 언젠가 우리 사회도 학벌주의 압력이 약화되는 날이 찾아올 수도 있을 테고 공교육에서 학업경쟁이 사그라들고 지덕체의 조화로운 함양이 가능한 날을 맞을 수도 있겠지. 그런 날이 오도록 하는 게 이 시대의 한 중요한 과제이기도 하다는 것엔 누구나 동감할 거야.

하지만 '보편과 특수'란 말이 있듯이 언제 어디서나 타당한 보편성이란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게 특수성이야. 주어진 시대와 사회, 환경 속에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특성을 외면할 수 없다는 거지. 그래서 입시경쟁의 상황에 처한 학생들에게 나는 유 씨와는 다른 말을 하고 싶어. 나는 꽤 많은 학생들을 정직하게 지도했다고 자부하거든. 나는 동일한 답안을 암기하라고 한 적도 없고, 보조 첨삭강사들을 쓴 적도 없으며, 내가 잘 쓴다고 칭찬한 학생들이 대개 원하는 결과를 얻어냈으니 이런 말을 할 자격은 있다고 생각해.

내가 현장에서 학생들과 땀을 흘리고 씨름하면서 얻어낸 지식을 공개할 테니 심상히 듣지 말고, 잘 새겨서 활용하면 좋겠네. 지식은 사실 어떤 한 인물이 전유할 수도 없거니와 독점해서도 안되는 거란 말이야. 선대의 지식이 전달되거나 축적되지 않았다면 인류는 지금도 어둠 속 미로를 헤매지 않겠니? 그래서 아낌없이, 정직하게 논술고사 문제를 풀어내고, 때론 노하우나 요령도 전해 줄 거야. 물론 이런 해설이나 조언 또한 두 눈 똑바로 뜨고 비판적으로 보길 바라. 아무리 좋은 말도 맹목적으로 수용하려 하면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 떨어지게 되거든.

실제로 논술문을 작성하라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지? 당연히 시각 정보가 음성 정보에 비해 풍부한 내용을 갖고 있지. 비슷한 식으로 백견이 불여일서라고도 할 수 있겠네. 여러 번 읽기만 하는 것보단 한 편의 논술문을 직접 써보는 게 낫다는 말이지. 규칙적인 운동으로 근력을 키울 수 있듯이 글을 직접 써봐야 두뇌의 근력도 생기는 법이거든. 수준에 맞는 논술문제를 펼쳐 놓고 어떻게 쓸지 고민을 시작해 보자. 자 어떻게 쓸까?

제발 부탁인데, 개요를 먼저 짜라. 이건 너를 위한 이야기야.
개요 혹은 메모를 작성하는 게 필요하다. 논제의 요구사항에 분명히 응답하는 문단들을 개요에 담아주는 거다. 개요 단계에서 분량도 적당히 배정해야 해. 그래야 규정자수에 못 미치거나 넘치는 일을 피할 수 있거든. 논술문은 엄격한 채점규정에 따라 평가하기에 규정자수 미달이나 초과 모두 일정한 자수 단위로 감점을 당하게 된단 말야. 네 생각에도 기능이 같은 문단은 분량도 비슷해야 할 것 같지 않니? 이걸 염두에 두고 분량을 배당하길 권한다. 예를 들어, '(가), (나)를 요약하고...'라는 요구사항이 있다고 하자. (가) 요약은 200자, (나) 요약은 50자면 심히 이상하지 않겠니? 논리와 이성을 중시했던 그리스의 건축물과 조각들이 '엄격한 비례와 균형'으로 유명하다는 걸 잊지 말아라.

출제자가 생각하는 답이 없을까? 정말? 레알?
논술문에 정답이 없다는 말이 정답이라고들 하지? 물론 정답 그것도 하나의 정답 따윈 없겠지. 열 명의 교수들을 저마다 시험장에서 논술문을 쓰게 해 보면 어떤 결과가 벌어질까? 아마 십 중 칠팔은 좋은 답안을 제출할 테고 몇몇은 형편 없는 평가를 받게 될지도 모르지. 그래서 얼굴을 붉히고 머리를 긁적이며 변명하는 교수도 있을 거야. 이 성공한 답안들을 보면 다 저마다의 개성이 담겨있을 거야.

하지만 논제가 기대하는 핵심 내용은 모두 담고 있겠지? 그래서 정답은 있으나 유일한 정답이란 없다는 정도로 우리의 상식을 교정할 필요가 있단 말이다. 때로는 정말 오답도 없는 열린 논술문제들도 있을 수 있어. 그런데 이런 이른바 '열린 논술'을 대개의 대학들은 좋아하지 않아. 그 이유가 무얼까? 정답도 오답도 없으면 객관적인 평가가 곤란하기 때문이지. 그래서 대개의 논술고사 문제는 다 출제자가 기대하는 답이 있다고 생각하고 접근하는 게 좋아. 그러니 출제자의 시선으로 논제와 제시문들을 읽어야 한다는 거지.

오답이 왜 오답인지를 알아야 보는 눈이 달라진다.
자 논술문을 힘들여 썼다고 하자. 그러면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할까? 평가를 받아야 해. 물론 논술고사 문제에 대한 해설을 들어야지. 요즘 많은 대학들에선 논술고사 문제에 대한 해설자료를 제공하거든. 선생님이나 친구들과 함께 이 논술문제에 대한 이해를 하는 과정이 뒤따르지 않으면 힘들여 논술문을 써봐도 배우는 게 적단 말야. 반드시 논술문제를 출제한 사람들의 소릴 들어서 논제와 제시문을 정확히 숙지하는 작업을 해야만 해.

그러고 나서 자신의 답안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매겨야지. 이건 권위 있는 제3자가 수행하거나 함께 공부하는 친구들과 토론으로 할 수도 있겠지. 학교 안에서 친구들과 진지하게 이런 일을 하는 문화가 턱없이 미흡한 게 사실이니, 학교 선생님이나 논술 선생님, 대학생 선배 등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겠지. 그래서 자신의 답안의 강점이 무언지, 어떤 점에서 감점을 당하는지, 반복되는 약점이 있는지, 구성은 적당한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아야 해. 그래야만 논술문 작성 경험이 귀하게 쌓일 수 있단 말이지.

다시 쓰는 게 필요하다?
그래 논제를 이제 이해했다는 말이지? 잘 쓴 답안이 어떤 건지도 알겠고? 그럼 잘 쓸 수 있겠네. 다시 한 번 써보는 게 어떨까? 대개 이 대목에서 학생들은 우거지상이 되기 십상이다.

'오 No!!! 다 아는데 왜 힘들게 다시 쓰란 말이죠? 정말 다시 쓰는 게 도움이 되나요? 정말 다시 써볼 필요가 있나요?' 이런 말들이 튀어나올 거야. 정말 다시 쓰기가 필요할까? 그럼 필요하지! 논제 해설을 잘 이해했다면 이 논제에 다시 답하는 건 어렵지 않겠지? 사실 아는 논제를 다시 쓰려니 투지가 솟지도 않고 심드렁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말 논제 파악에 성공하고 이 논제에 적합한 좋은 구성도 알게 되었다고 해도 정말 수고스럽게 분량을 통제하면서 군더더기 없는 답안을 완성하는 건 여전히 쉽지 않아. 그리고 이런 수고를 들여 성공적으로 한 편의 논술문을 완성할 때 비로소 논술문 구현의 힘이 몸에 깊게 새겨질 수 있는 거란 말야. 그러니 빠른 시간에 논술 능력을 향상시키고 싶다면 다시 쓰기와 친해져야 한다.
좋아! 다시 써보겠단 말이지?
어허! 개요부터 다시 짠 다음에 써야지!

이 달의 미션
이번엔 간만에 변별력이 높은 난해한 논제 속으로 들어가 보자. 논술고사 문제의 난이도로만 평가하면 서울대학교도 능가한다는 서강대학교 논술고사 문제들 중에서 골랐다. 제대로 답하는 경우를 찾기 힘든 문제니 오히려 마음의 부담을 벗어던지고 가벼운 마음으로 임해 보길 권한다. 이 문제는 대략 70~80분 정도 시간을 잡고 쓰는 게 좋겠다. 분량이 긴 편이니 한 문단의 분량도 넉넉하게 배정할 필요가 있겠다. 자 연습장을 펼치고 개요를 짜고, 어떤 내용을 담을지 궁리한 후 간단히 메모부터 하렴. 논제와 제시문들을 거듭 읽어보며 개요를 이리저리 수정하고 각 부분에 적당한 분량도 할애한 후 논술문 작성을 시작하기 바란다.

- 김정희, 「세한도(歲寒圖)」

[다] 이런 말이 전해온다. "하늘은 사람이 추위를 싫어한다고 해서 겨울을 끝나게 하지 않으며, 군자는 세상이 어둡고 혼탁하다고 해서 그 행동을 바꾸지 않는다." 어찌 바꾸지 않기만 하겠는가? 오히려 더욱 굳게 지킨다. 굳게 지켜야만 세상이 융성하거나 쇠퇴해도, 사람의 운명이 평탄하거나 역경에 처해도 개의치 않게 된다. 앞으로 나아가야 할지 뒤로 물러서야 할지 살아남아야 할 것인지 목숨을 버려야 할 것인지를 헤아려 정도를 벗어나지 않는 사람은 군자뿐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 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소나무와 잣나무가 굳은 절개를 지니고 있지만 눈서리를 맞지 않았을 때에는 사람들이 대부분 소홀히 여기므로 그 절개를 알아보기 어렵고, 등용하는 경우도 적다는 것을 너무나 안타까워 하신 것이다. 비록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 해도 그것이 겨울에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다. 군자가 소나무와 잣나무의 절개를 배우고자 한다면, 겨울이 닥치기 이전의 절개를 먼저 배워야 한다. 그들은 절개를 늘 지니고 있으므로 사시사철 바꾸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저 보통 화초들이라고 해서 겨울이 되면 소나무와 잣나무처럼 되기를 어찌 바라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은 평소 그 절개가 견고하지 않아서이다.

평소에 절개가 견고하다가도 다급한 순간에 변하는 사람도 있지만, 평소에도 절개가 견고하지 않은데 다급한 순간에 변하지 않는 사람은 들어보지 못했다. 그러니 군자가 소나무와 잣나무의 절개를 배우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절개를 높이 세우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세상을 오만하게 보려는 것이 아니라, 자칫하면 보통 잡초들과 같은 무리가 될까 걱정되어 그러는 것이다. 스스로를 굳세게 단련시키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옛날 사람들을 본받고 싶어 그러는 게 아니라, 자칫하면 자신의 높은 뜻을 잃어버릴까 염려하여 그런 것이다. 산속 바위틈에서 늙어가면서도 고독하다 여기지 않는 것은 그 재목을 길러 쓰임에 대비하기 때문이다. 목수에게 버림받아도 원망하지 않는 것은 나의 참모습을 보전하여 천수를 누리기 때문이다. 겨울이 되지 않으면 보통 화초와 다를 게 없고, 겨울을 여러 번 거쳐도 그 나뭇가지는 조금도 다르지 않다. 세상에 그 절개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어도 소나무와 잣나무는 그대로이고, 세상에 그 절개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도 소나무와 잣나무는 그대로이다. 그러므로 한겨울이 되어서야 그 절개가 드러난다고 소나무와 잣나무가 즐거워할 일은 아니며, 한겨울이 되어서야 그 절개를 알게 된다면 소나무와 잣나무를 깊이 아는 사람이 아니다.
― 장악진, 「세한도 제영(題詠)*」

[라] 추사는 문득 겨울 한파와 적막과 침잠 속에서 다사로운 몸피를 둥그렇게 키우고 있는 우주의 시원을 형상화시켜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림 한 폭이 머리에 그려졌다.

설 전후의 고추 맛보다 더 매운 찬바람이 몰아치자, 모든 짐승과 새들은 모습을 감추고, 푸나무들은 죽은 듯 말라져 적막하건만, 건장한 소나무만 푸른 가지를 뻗은 채 우뚝 서서 제 몸을 지탱하기 힘들어하는 늙은 소나무 한 그루를 부축하고 있다. 그 부축으로 말미암아 늙은 소나무는 간신히 푸른 잎사귀 몇 개를 내밀고 있다. 그 두 나무 옆에 집 한 채가 있는데 그 집은 마음을 하얗게 비운 유마거사처럼 사는 한 외로운 사람의 집이다.

'세상의 모든 중생들이 앓고 있는데 어찌 깨달은 자가 앓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며 칭병하고 누운 채, 문병하러 오는 불보살들에게 불가사의 해탈의 진리를 설하는 유마거사. 그는 일체의 탐욕으로부터 벗어난 손님들에게 깨달음의 세계를 보여줄 심산으로 그의 집 거실을 텅 비워놓았다.

세한 속에서 얻은 불가사의 해탈의 무한 광대하고 둥근 깨달음[圓覺]은 텅 빈 하늘을 흡수지처럼 빨아들인 신묘한 힘이다. 수미산을 겨자씨 속에 넣고, 세상의 모든 바닷물과 강물들을 한 개의 털구멍 속에 다 쑤셔넣을지라도, 수미산과 겨자씨와 사해의 물과 털구멍들이 모두 끄떡도 안 하는 그 신묘한 힘은 공자와 맹자의 어짊과 안빈낙도와 노장의 무위와 다르지 않다. 그 힘은 그 집의 주인으로 하여금 장차 병에서 일어나 중생들과 더불어 살게 할 터이다. ― 한 승 원, 「추사」

[마] 골재 채취한다고 산 한쪽이 뭉텅 잘려나가고
아물지 않은 상처처럼
붉은 절개지는 겨울이 다 가도록 흉하게 드러나 있다
그 위 언덕에는 잎이 붉게 변하며 말라가는 소나무 몇 그루
소나무 가지에 걸린 달이 협곡으로 빠질 때
병든 가장(家長)이 식구들 없는 빈집에서
혼자 남아 기침을 하고 있다
― 장석주, 「세한도(歲寒圖)」

*제영(題詠): 정해진 제목에 따라 지은 시. 추사 김정희로부터 「세한도」를 선사받은 제자 이상적이 그림을 갖고 청나라 연경에 가서 장악진 등 청조문사들에게 보여준 다음 여러 편의 제영을 받았음.

논제해설

논제 : 제시문 [다] [라] [마]는 그림 [나]를 보고 지은 글이다. [가]의 논지를 활용하여 [다] [라] [마]에 나타난 [나]의 수용과 창작 과정의 특성을 변별적으로 논의하라.

지면의 제약으로 제시문 내용은 따로 서술하지 않겠다. 사실 제시문 각각에 대한 이해는 그리 어렵지 않다. 정작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위에 재인용한 짧은 논제라고 하겠다. 첫 번째 문장은 친절한 가이드를 담고 있다. 제시문 [다] ~[마]가 모두 그린 [나]를 보고 지은 글이란 걸 밝혀주고 있지? 두 번째 문장이 예사롭지 않아. '[가]의 논지를 활용하여 [나]의 수용과 창작 과정의 특성을 변별적으로 논의'하라니? 이게 무슨 뜻이지? 때로 한국어가 낯선 외국어보다 어려울 수 있다는 하나의 실례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곰곰이 따져보자.

먼저 [가]의 핵심 논지를 추출해내어야 한다. [가]에 따르면 동일한 대상에 대해 서도 사람들은 서로 다른 미적 경험을 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이러한 미적 경험으로부터 도출하는 가치도 다르다고 한다. 미적 경험의 주체인 예술가들이 가진 개성과 지식, 상상력 등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들의 가치관이나 지식은 또한 그들이 속한 시대의 조류나 사회의 특성에도 영향을 받기 때문에 동일한 미적 대상을 보면서도 상이한 해석을 하거나 상이한 가치평가를 매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 조선시대의 문인화를 오늘날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을 만나긴 쉽지 않겠지. 인상파가 등장한 후 고전파 미술이 급격히 평가절하된 예도 그렇지. 인상파가 유행하던 시기에 앤디 워홀이나 프란시스 베이컨의 미술작품이 등장했다면 어떤 평가를 받았을까? 뒤샹의 설치미술작품이 초기에 평단이나 관람객들에게 준 충격도 이젠 친숙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지?

이런 [가]의 논지를 염두에 두고 [다], [라], [마]에 나타난 [나]의 수용과 창작 과정의 특성을 변별적으로 논의해보자. 모두 동일한 추사의 세한도를 재료로 하고 있지? 어떤 점에서 세한도를 저마다 다르게 수용하고 변용했는지 그 차이가 드러나게끔 서술하라는 것이 논제의 취지다. 먼저 [다]는 추사의 세한도가 그려내는 세상과 다르지 않다. 유교의 이상적 인간형인 군자가 마땅히 지녀야 할 '지조와 절개'의 중요성을 예찬하며 세한도가 바로 이것을 고졸하게 표현했다는 찬사로 일관하기 때문이다. 당대의 청나라 문사들에게서 받은 제영들이니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관건은 [라]와 [마] 해석이다. 어떤 점에서 크게 달라졌을까? [라]에선 놀랍게도 추사가 세한도를 창작하는 의도를 불교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 점이 핵심이다. 사실 유교는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 내세의 구원을 말하지 않는다는 점만 빼곤 종교의 속성을 모두 지니고 있다. 그래서 유교이념을 숭앙하던 선비들은 '거칠고 조잡한 야만의 도'인 불교나 '신의 피조물인 인간의 원죄와 구원'을 설파하는 기독교를 필요로 하지 않았던 거다. 잘 알려지지 않은 추사의 에피소드엔 추사가 전남 강진땅에 유배되었을 때, 인근의 주지승을 학문적으로 설복하여 불법에 대한 믿음을 깨뜨려버린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런데 [라]는 음험하게도 혹은 의뭉스럽게도 추사와 세한도의 작의를 '중생을 구제하려는 유마거사의 자비심'에 빗대거나 광대 무변의 해탈을 묘사하는 것으로 바꿔치고 있는 것이다. 아 그래도 되는 것인가? 그래도 된다. 예술작품은 예술가 자신의 개성이나 지식, 상상력 등에 의해 새롭게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면 [마]엔 어떤 새로운 해석이 들어있을까? '골재 채취'와 '붉은 절개지', '병든 가장의 기침' 같은 시어들이 시인의 눈길을 보여준다. '골재 채취한다고 산 한쪽이 뭉텅 잘려나간' 을씨년스런 상황은 자연을 훼손하는 물질문명의 황량함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 더 중요한 것은, 다들 떠나간 상태에서도 미처 이주할 곳을 마련하지 못해 위태롭게 남은 철거민을 형상화한 시어들이다. 아마도 곧 철거될 것 같은 낡은 집과 거기에 혼자 남은 병든 가장의 기침.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언어영역에서 많은 시들을 접한 학생들이라면 어렵지 않게 답할 수 있겠지. 그래 이시는 경제성장의 이면에서 고통받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는 거다. 문자 그대로 이 시의 제목 세한도를 다시 풀어보면 '추운 날의 풍경'이라고 할 수 있겠네. 여기에서 추사의 세한도가 당대에 의도했던 '지조나 절개'가 담겨 있진 않지? 작가는 추사의 세한도에서 영감을 받아 강자 위주의 불평등한 사회현실에 대한 비판의 시선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돌아가서 논제를 다시 보자. 정말 [가]의 말처럼 동일한 대상이라도 저마다 느끼는 감흥, 미적 경험은 다르다는 것이 실감 나지? 예술적 창조는 자신만의 개성, 지식, 상상력 등을 (미적) 경험에 투여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말 그대로지?

논제가 길다. 1,300 ~ 1,500자나 되니 말야. 그러니 이 정도 분량의 글이라면 마지막에 별도의 단락을 배치해서 결론을 서술하는 편이 낫겠다. 그냥 [마] 해석에서 끝나는 경우 글의 완결미가 떨어지는 인상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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